섭식장애 정보, 왜 한국에서는 찾기 어려울까: 정보 포털을 만든 이유

공익사업팀 박수진 매니저

202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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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재단 '공익콘텐츠 제작 지원사업'



공익콘텐츠 제작 지원사업은 '변화의 시나리오 스폰서 지원사업'을 개편해 새롭게 선보이는 사업입니다. 작지만 중요한 사회 문제를 다루는 공익 단체들이 더 많은 사람들과 이어지고, 함께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콘텐츠 제작을 지원합니다. 이번 사업에 참여한 20개 단체의 작은 움직임에서 비롯된 변화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번 글은 공익콘텐츠 제작 지원사업에 참여한 잠수함토끼콜렉티브가 전합니다. 앞으로 공익 단체들의 활동이 더욱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더 멀리 퍼져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문제의 출발점: 왜 기존의 섭식장애 정보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번 프로젝트를 아름다운재단에 제안하면서, 처음부터 머릿속에 있었던 단순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왜 한국의 웹 공간에서 섭식장애 정보는 이렇게까지 도움이 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었죠.

섭식장애를 겪는 당사자와 그 가족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기 시작하는 순간은 대개 절박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웹 환경에서 그들이 마주하는 정보는 부정확하고 피상적인 정보, 혹은 사실상 광고에 가까운 콘텐츠로 나뉩니다.

문제는 단순히 질 낮은 정보가 많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정보가 정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당사자와 가족은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찾지 못한 채 웹을 헤매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특히 치료와 관련해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에, 이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콘텐츠 몇 편을 더 만드는 일’이 아니라 정보가 흩어지고 왜곡되는 구조 자체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답으로 선택한 형식이 바로 ‘포털 웹사이트’였습니다.

무엇을 만들지 않기로 했는가: 진단 중심 정보에 대한 거리두기

동시에 분명히 거부하고 싶었던 방식들이 있습니다. 이 포털은 또 하나의 ‘섭식장애란 무엇인가’, ‘거식증이란?’, ‘거식증의 증상’, ‘거식증의 신체적 합병증’ 같은 글들을 모아놓은 공간이 되지 않겠다는 점입니다. 이미 거의 모든 대학병원 웹사이트에 비슷한 글들이 존재하지만, 대개 오래된 교과서적 정의를 반복하며 현실의 복잡한 상황과는 거의 맞닿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정보들은 중립적인 설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통을 단순화하고 당사자와 돌봄 제공자를 부당하게 판단의 대상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 프로젝트가 만들고자 한 포털은 정의부터 설명하는 공간이 아니라 이미 문제 속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알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며, 어디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를 판단의 주체로서 탐색할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포털은 속도보다 기준을, 양보다 신뢰를, 설명보다 맥락을 우선하는 방식으로 기획되었습니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 판단의 주체를 사용자에게 돌려주는 정보 구조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기술이나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다룰 것인가, 그리고 어떤 언어로 다룰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섭식장애 관련 정보는 이미 넘쳐나지만 대부분 정신의학적 진단 체계에 기대거나, 교과서적 정의를 반복하거나, 혹은 독자의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소비됩니다. 이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그런 접근을 피하고자 했는데, 실제 당사자와 가족에게 지금 필요한 질문은 대개 ‘나는 어떤 병인가’가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이 위험할 수 있는지’, ‘어떤 종류의 도움을 경계해야 하는지’, ‘무엇을 모른 채 결정하게 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지’와 같은 질문들이기 때문입니다.

콘텐츠 제작에서 가장 어려웠던 선택: 무엇을, 어떤 언어로 다룰 것인가

동시에 콘텐츠의 톤 역시 중요한 문제로, 읽기 편하지만 가볍지 않고, 공감은 하되 위로하거나 고무하지 않으며, 절박한 상황을 소비하지도 않는 언어를 찾는 일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행착오를 요구했습니다. 의도적으로 감정적 서사나 ‘영감을 주는 이야기’, 피해자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 역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글은 더디게 완성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콘텐츠 제작 속도는 초기 예상보다 느려졌지만 이는 단순한 지연이라기보다 어떤 공익 정보가 책임 있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를 끝까지 검토하는 과정에 가까웠습니다.

셀프 테스트의 재정의: 진단이 아닌 일상의 질문으로

이러한 여러 번의 수정과 재설계를 거치며 프로젝트의 문제의식과 방향이 가장 또렷하게 모인 지점은 의외로 하나의 기능, 바로 ‘셀프 테스트’였습니다. 다만 이 셀프 테스트는 흔히 말하는 ‘자가 진단’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자가 진단’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거식증, 폭식증과 같은 진단명 역시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단순한 표현상의 선택이 아니라 분명한 판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섭식장애를 겪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이름을 붙이는 일, 혹은 그 이름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일은 도움이 되기보다 상황을 더 경직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단명은 이해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일상의 혼란을 해결해 주지는 않기에, 이 셀프 테스트가 지향한 것은 “나는 어떤 병일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지금 내 일상에서 무엇이 가장 버거운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질문들은 증상을 나열하거나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 아니라, 일상에서 반복되는 혼란, 갈등, 자기비난의 순간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결과 역시 사람을 분류하지 않고 지금 당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언과 주의점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 기능은 결과적으로 이 포털이 왜 진단 중심 정보에서 거리를 두었는지, 왜 감정적 서사를 앞세우지 않았는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이 되었습니다.

클리닉 정보의 기준: 권위가 아니라 정보 비대칭을 줄이기 위해

클리닉 정보를 설계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한 질문은 ‘어떤 기준으로 포함할 것인가’였습니다. 섭식장애 영역에서는 “잘 알려진 이름”이 반드시 “신뢰할 수 있는 실천”을 의미하지 않으며, 한국처럼 클리닉 풀이 제한적인 환경일수록 목록은 쉽게 ‘권위의 지도’가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외 공공 데이터베이스 운영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잠수함토끼콜렉티브가 한국 대표로 가입해 있는 국제섭식장애연구컨소시엄(CoRe-ED)의 디렉터인 젬마 샤프(Gemma Sharp) 교수로부터 단순히 누군가를 ‘추천’하거나 ‘인증’하는 방식이 아니라 체크리스트 기반의 신청 구조를 만들라는 조언을 받았습니다. 이 조언은 본 포털의 방향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습니다. 이 포털은 클리닉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플랫폼이 아니라, 당사자와 가족이 보다 덜 다치면서 선택할 수 있도록 정보 비대칭을 줄이는 구조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포털의 클리닉 영역은 ‘많이 모으기’가 아니라 기준을 먼저 세우고, 그 기준에 따라 천천히 확장하기라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는 속도를 희생한 선택이지만, 그만큼 책임을 확보하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클리닉 신청 폼에 담긴 원칙: 완전한 정보 공개

이 포털의 또 다른 핵심은 클리닉 신청 폼에 담긴 원칙, 즉 사용자에게의 완전한 정보 공개였습니다. 한국의 섭식장애 치료 환경에서 당사자와 가족이 가장 자주 겪는 어려움 중 하나는 정보의 공백입니다. 특히 처음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했을 때 진료 당일에야 예상보다 훨씬 큰 비용을 청구받는 경험은 낯설지 않은데, 심리검사나 상담 등 비급여 항목에 대한 사전 설명이 부족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 신청 폼은 바로 이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목표는 클리닉를 평가하거나 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최대한 공개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청 폼에는 실제 발생 가능한 비용 항목과 보험 적용 여부, 초기 방문 시 요구되는 검사나 절차, 클리닉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치료 접근 방식 등을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기재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이는 클리닉에게는 번거로운 요구일 수 있지만, 이 프로젝트는 편의보다 사용자의 판단권을 우선했습니다. 당사자와 가족이 ‘몰랐기 때문에 감당해야 했던 비용과 혼란’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이 이 포털의 핵심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개발 파트너 선택의 이유: 태도와 철학

개발 파트너로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선택한 이유도 특별합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역량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민구홍’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하면 알 수 있듯, 그는 웹과 디자인을 정보 전달의 도구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로 다뤄 온 창작자입니다. 무엇을 더 보여줄 것인가보다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맞이할 것인가를 묻는 작업들이 이 프로젝트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섭식장애 정보 포털은 빠른 전환율이나 자극적인 인터페이스를 목표로 하는 웹사이트가 아니라, 절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천천히, 반복해서,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이어야 했습니다. 이 관점은 비전문 운영자도 장기적으로 지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도록 콘텐츠 추가와 수정이 직관적인 관리자 페이지 설계로 이어졌는데, 이는 이 포털을 단발성 결과물이 아니라 계속 살아 있는 공익 인프라로 만들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빠른 확산보다 점검의 시간

현재 이 포털은 기술적으로는 이미 공개되어 누구나 접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적극적으로 알리거나 홍보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의도적으로 선택한 단계에 가깝습니다. 방문자 수나 반응을 빠르게 끌어올리는 대신, 실제 당사자와 가족의 시선에서 불편한 지점은 없는지, 정보의 맥락이 오해 없이 전달되는지, 구조적으로 더 보완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차분히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이 포털이 ‘완성된 결과물’이 되기 전, 자유롭게 수정하고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이기도 합니다. 콘텐츠의 기준과 구조, 클리닉 정보의 형식, 셀프 테스트의 질문과 결과 연결 방식 등은 지금도 계속 다듬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이 포털의 의미는 이미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서비스에 있다기보다, 어떤 기준으로 공익 정보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속도나 숫자보다 책임과 신뢰를 우선하는 방식을 택했고, 이제 이 포털은, 조심스럽게 열어 두고 천천히 말을 걸 준비를 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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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섭식장애를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젠더, 신체 규범, 가족 구조, 돌봄의 위기, 의료 접근성 등 복합적 사회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사회적·정치적 문제로 인식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당사자의 경험(lived experience)을 중심에 둔 언어와 연대를 통해 섭식장애와 주변의 침묵을 깨고, 기존 치료 시스템에 포섭되지 않았던 목소리를 공론화하며,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실험하고자 2023년 1월 설립되었습니다. 단체는 환자, 생존자, 시민이 주체가 되어 제도 변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rabbitsubmarinecol/

글,사진 잠수함토끼콜렉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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