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중순,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AFA)’의 과정으로 글로벌스터디를 위해 호주에 다녀왔다.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는 소셜섹터 중간관리자들이 사회혁신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전문 교육 프로그램으로, 7개월 간의 교육 기간 동안 팀을 이루어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상반기에는 팀원들이 골라온 사회문제 중 하나를 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하반기에는 해당 문제를 색다른 시각으로 해결하고 있는 해외 기관 등에 직접 방문해 협력의 기회를 마련한다. 내가 속한 4조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골랐고, 전세계 최초로 “죽음문해력*”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다층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호주에 방문했다.
죽음문해력이란?
개인과 공동체가 돌봄과 임종, 죽음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역량을 말한다. 호주는 이걸 지수(Death Literacy Index, DLI)로 매년 측정해 정책 제안의 근거를 만든다.
이번 글에서는 프로젝트만큼 인상적이었던 호주의 문화를 소개해보려 한다.
‘호주’라는 나라는 여행을 다녀온 주변 사람들이 모두 정말 좋았다는 평이 자자한 곳이다. 그래서 한번쯤 가보고 싶기도 했지만 사실 이번엔 프로젝트 주제 ‘죽음’ 외의 것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남반구 국가라는 점과 청정 자연, 오페라하우스, 캥거루와 코알라, 또 뭐가 있지?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떠올리며 BTS와 경복궁, 비빔밥 정도를 떠올린다고 하면 섭섭할텐데, 놀랍게도 내가 호주라는 국가에 너무나 무지하다는 걸 깨달았다.
클로드에게 초등학교 1학년에게 호주를 소개해보라고 했더니 아래와 같은 답을 주었다.

비행기를 타고 아주 오래 가면 호주라는 나라가 있어. 우리가 눈사람 만들 때, 호주 친구들은 바다에서 수영하는 거꾸로 나라야.
호주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살아. 그래서 "호주 대표 음식이 뭐야?"하고 물으면 다들 고민해. 거리에 나가면 베트남 쌀국수, 이탈리아 피자, 인도 카레, 한국 떡볶이까지 세계 음식이 다 있거든.
호주 사람들은 큰 행사를 시작할 때 "이 땅에 먼저 살던 원주민분들께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해.
가게 문에는 "누구든 환영해요!" 스티커가 붙어 있어. 공연장에는 귀가 잘 안 들리는 사람을 도와주는 기계가 있고, 공원에는 누구나 공짜로 쓰는 바비큐 그릴이 있어. 아프면 나라가 병원비를 많이 대신 내줘.
호주 사람들은 동물이랑 나무를 '이웃'이라고 생각해. 공원에서는 오리 가족이 산책하고, 하얀 앵무새가 잔디 위를 걸어 다녀. 아무도 쫓아내지 않아. 오래된 큰 나무는 동네 할아버지처럼 소중하게 지켜줘. 도시는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사는 집이니까.
클로드 설명 잘하네? 읽고 보니까 내가 보고 온 호주가 딱 그랬다. 웅장한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릿지도 멋졌지만, 그보다 내 마음에 남은 건 시드니와 멜버른 구석구석 매력적인 광경들. 휴대폰 사진앨범은 내 마음이 기운 곳들의 집합소다. 특별히 공개!
1. 일상 가까이에서, 평범한 시민들을 기리는 일
시드니와 멜버른 곳곳에는 어떤 의미와 서사를 담은 안내문이 붙어있다. 엥? 기념관도 박물관과 미술관도 아닌 길바닥에 이렇게 멋진 안내문이 있다고? 절로 궁금해 번역기를 돌려보면, 대부분 이 장소에서 어떠한 노력을 했던 누군가를 기린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1) 식민지시대, 헌신한 간호사들을 기리는 ‘Nurses walk’

혼자만의 산책을 하던 저녁 시간, 시드니 더 록스의 한 골목을 지나다 본 ‘너스 워크(Nurses Walk)’. 1788년부터 이 자리에 있던 시드니 첫 병원에서 일한 여성들을 기리는 길이다. 1788년은 영국함대가 죄수들을 태우고 처음 시드니에 도착했던 때다. 오랜 항해로 인해 많은 죄수들이 장티푸스, 천연두, 괴혈병 등에 걸려 있던 상태라 주지사는 임시천막을 세워 병원을 만들었고, 여성 죄수 중에서 선발된 인원에게 간호를 맡겼다. 이들은 급여를 받지 못하고 공공 비용으로 최소한의 생계만 유지하며 환자들을 돌봤다고 한다.
안내문 마지막 줄에는 “Nurses Walk는 The Rocks와 호주 전역에서 근무한 모든 훌륭한 간호사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는 문장이 적혀있다. 갑자기 마음이 웅장해져 간호사 친구에게 찍어서 바로 보내줬다.
2) 지역 수영클럽과 청소년센터를 일군 ‘이사 와이’를 기리다


시드니 외곽에 위치한 디와이비치에는 바다와 경계가 무색한 특별한 수영장이 있다. 호주의 바다는 파도가 거친 편이라 바다 수영을 하기에 위험할 수도 있어서 이렇게 바닷물이 드나들어도 상관 없도록 수영장을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이곳에는 ‘이사 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70년 가까이 지역 수영클럽과 청소년센터를 일군 인물이라고 한다.
3) 도로 건설에 투입된 강제노역 노동자들의 희생과 노고를 기리는 동상

블루마운틴 산 중턱에는 족쇄를 차고 있는 노동자들의 동상이 있다. 이 기념비는 1813년에서 1815년 사이에 죄수들의 강제 노역을 동원해 블루마운틴을 관통하는 최초의 도로인 콕스 로드(Cox’s Road)를 건설하며 뉴사우스웨일스 중서부 지역을 개척한 이들의 희생과 노고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당시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재현한 실물 크기의 청동 조각상들이 함께 조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땅에 먼저 살아온 원주민 부족의 이름도 함께 새겨져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참고 자료 출처: 링크
2.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긴 안내문
1) 멜버른에 위치한 라트로브 대학교 안에 있는 한 식당

전문가 인터뷰를 하러 방문한 멜버른의 라트로브 대학교 안의 한 식당에서 “어린이는 토요일에 공짜!”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세상에. 아름답구나,, 싶으면서도 한국의 노키즈존의 존재를 호주 사람들이 들으면 놀랄 노짜일듯,, 하는 다소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2) 시드니의 한 호텔 입구에 붙어 있는 LGBTQ+ 웰컴 표기

시드니의 거리를 지나다 한 호텔 문 앞에 붙어있는 무지개 마크를 보았다. 나중에 미팅한 기관에서 듣고보니 LGBTQ+ 인증 가게에게 저렇게 딱지를 주는 캠페인이 있다고 한다. 이주민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나라답게, 누구든 환영한다는 표시가 일상에 자리 잡은 것 같아 마음 좋아 상태가 됐다.
3) 난청인들도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장치를 설계했다는 ‘히어링루프’ 표식

히어링루프라는 말을 아시는지? 보청기나 인공와우 착용자가 주변 소음 없이 또렷한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돕는 무선 청취 보조 시스템이다. 아직 한국에는 도입된 곳이 흔치 않은 반면, 호주는 오페라하우스를 비롯한 크고 작은 장소 곳곳에 해당 표식이 붙어 있었다. 최근 한국에서도 K팝 공연장 최초로 난청인을 위한 청취보조시스템을 도입하는 사회공헌 사업 사례를 본 적이 있어 괜히 반가운 마음에 찍었다.
4) “들 어 가 지 마 시 오”의 새로운 표현

시드니에 위치한 전쟁기념관의 웅장한 모습. 그 앞 물가에서 “Please Respect The Memorial”이란 작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던 사람도 저 정중하고 웅장한 문장을 보면 멈칫할 것 같다.
3. 청정자연, 동네에서도 볼 수 있는 거였어?
호주하면 인간을 하찮게 만드는 거대한 자연을 떠올렸다. 산, 사막, 바다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내가 보고 놀란 건 동네마다 자리한 드넓은 공원과 이렇게 커도 되나 싶은 가로수의 크기였다. 자연의 은혜, 동네에서도 누릴 수 있는 거였구나.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풍경에 내 육신에 깃든 피로가 소독되는 듯했다.


시드니 도심 속 하이드 공원에서 만난 거대한 나무의 모습에 뭐라도 지켜줄 것 같은 위안을 받았다. 내가 작은 게 아니라 나무가 큰 거다. 멜버른 박물관 인근 도로변에서 만난 침엽수는 어떻고? 동화책에 나오는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생겼잖아? 자연스럽게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린 모습을 상상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 옆에 자유롭게 노니는 앵무새들까지. 백설공주 감성 저리가라

멜버른 박물관 앞 공원, 칼튼 가든에는 오리 가족이 살고 있다. 여기도 사실은 마치 여의도와 같은 도심 속 대로변에 있는 공원이다. 큰 나무의 스케일과 드넓은 잔디밭, 여유롭게 독서 중인 시민들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왜 아무도 휴대폰을 보지 않는거지? 도파민 중독자 한국인에겐 낯설기도 한 풍경이었다. 아기 오리가 너무 귀여워서 가까이 갔더니 사람을 무서워하긴 커녕 엄마 오리가 나를 위협하길래 “미안해 미안해!”하고 백스텝 밟은 사연
4. 태어나서 처음 본 오션뷰 묘지
시드니 동부 교외 지역 브론테의 절벽 꼭대기에는 특별한 공원이 있다. 뉴사우스웨일스(NSW)주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웨이벌리 묘지공원이다. 묘지라고 하면 동그란 봉분이 떠오르는 한국인에게는 제법 낯설고도 충격적이기까지 한 풍경이 펼쳐진다. 가슴이 뻥 뚫리는 오션뷰를 배경으로 약 5만구의 시신이 묻혀있는 웨이벌리 묘지공원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주의 문화유산을 신청해 지켜낸 의미 깊은 곳이라고 한다. 함께 살아가는 시민과 공동체의 죽음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제법 감동적이다.

처음 들어가자마자 엥? 이게 묘지? 하고 인지부조화를 겪게 한 놀라운 풍경을 공개한다. 고인의 생전 삶과 개성을 반영하기라도 한 듯 똑같은 디자인이 하나도 없었던 비석들 모두 예술 작품 같았다. 평소 죽음에 대해 별 생각이 없던 사람도 내가 여기 묻힌다면 나는 어떤 모양으로 묘비를 만들까 생각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달까?

“묘지의 친구들”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투어도 할 수 있다. 지역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소정의 참가비를 받고 주요 묘지와 역사적 인물, 특별한 사연을 가진 평범한 시민들의 묘를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참가비는 다시 이 곳을 운영하고 유지, 관리하는 데 사용된다. 우리가 투어에 참여하며 약 한시간 반 가량을 돌아보는 동안 동네 주민들이 아이들 또는 반려견과 함께 묘지 사잇길로 산책을 하고, 씩씩한 러너들이 우르르 달려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름만 공원이 아닌 진짜 공원이라는 데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았던 묘비명, “He’s cute alright, and smart, but not as cute and smart as he thinks he is. – Dale’s mother”
Dale 선생님, 제가 좀 웃어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호주에 가기 전, 내 머릿속 이미지는 오페라하우스와 캥거루가 전부였다.(미안해요, 호주 사람들!) 다녀오고 나니 기억에 남은 건 골목의 안내문, 문 앞의 스티커, 공원의 오리 가족, 동네의 수호신 같은 커다란 나무들이다. 내 마음이 기운 곳은 전부 누군가를 기억하고, 반기고, 지키는 장면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는 이곳에도 구석구석 살펴보면 꽤 발견할만한 게 있지 않을까? 왜 여행지에서 느끼는 포착의 즐거움을 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할까? 돌아와서 우리 동네를 찬찬히 걸어본다. 여긴 뭐가 있지? 애정을 갖고 살펴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온도가 올라갈지도 모르겠다고 기대해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