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하굣길을 견디는 아이들
얼마 전 남원역에서 버스를 타고 산내면 사무실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에는 평소 자가용으로 다닐 때 보기 힘들었던 교복 입은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시간대를 보아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굽이굽이 내달리는 버스 안에서 단잠을 자거나,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또는 거친 입담(!)으로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1시간 남짓 시골길을 달린 버스가 띄엄띄엄 떨어진 정류장에 아이들을 내려 주었다. 하나 둘 버스에서 내려 마을로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등하굣길이 참 고되겠다’ 생각했다.
그 경험 때문인가. 지리산 청소년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버스에 실린 아이들’이었다. 시내에 있는 학교와 점처럼 흩어진 집을 오가기 위해 긴 등하교길을 ‘견뎌야 하는’ 아이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뚝뚝 떨어진 마을과 집으로 각자 흩어져 길에서도 어른들의 눈에서도 사라져 버리는 아이들. 지역에 살면서 이 아이들이 느끼는 심심함과 고립감은 어른이 견디는 것 그 이상이지 않을까?
하동의 자연환경은 정말 좋아요. 하지만 아이들이 모여 놀 수가 없다는 게 너무 아쉬워요. 아이들이 학교 끝나고 스쿨버스 가는 시간에 돌아가지 않으면 집을 못 가잖아요. 그리고 집들이 다 너무 떨어져 있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같은 아파트 사는 경우에는 만나서 그냥 놀 수 있지만, 여기는 아이들이 친구와 놀라치면 부모와 약속을 잡고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그래야 하죠. 게다가 시골에 사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성범죄와 같은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어요. 도시에 비교해 어둡고 으슥한 데가 훨씬 많기 때문이죠.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는 ‘우악청’이라 불리는 공간이 하나 있다. 간판은 없지만, 늘 환하게 켜 놓은 불빛 덕분에 멀리서도 한눈에 잘 들어오는 이곳은 하동 악양면 청소년들이 모여 편히 쉬는 공간이다. 우악청은 하동군 악양면에서 아이를 키우는 송로이(이하 로이), 이순경 (이하 단비)이 지난해 마련한 공간이다. 아담하지만 하동 청소년들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가 된 이곳에서 로이를 만났다.
우악청은 알아서 잘~ 굴러갑니다!
처음에는 우악청이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요. 이전에 술과 음식 팔던 곳이라 앞이 막혀 있었는데, 아이들이 ‘앞이 보이게 뚫려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지금과 같이 만들었죠. 아이들이 공간 이름도 ‘우리들은 악양 청소년’이라고 해서 우악청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처음 아이들과 만나 이 공간을 만들 때, 저랑 단비, 그리고 아이들 모두 경험이 없어 정말 막막했어요. 일단 공간은 마련했는데, 아이들에게 뭐 하고 싶냐고 물어보면 모르겠다고만 하고. 그래서 정말 어려웠죠.
우악청 친구들은 로이를 이모라 부른다고 했다. 로이는 우악청 옆 공방에서 옷 만들기를 가르치는 강사다. 공방이 우악청 바로 옆에 있다지만, 하동 지역 곳곳으로 강의를 나가다 보니 우악청 챙길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처음 공간을 열었을 때는 의욕이 넘쳐 아이들에게 떡볶이나 김밥 같이 간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생업을 병행하며 공간을 운영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함께 공간을 연 단비도 생업과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협력파트너 활동을 하면서 우악청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공간의 주인이자 사용자인 아이들이 공간을 스스로 관리(!)하게 되면서 로이와 단비가 품을 들이지 않아도 ‘알아서 잘 굴러가고 있는 중’이다. 많은 시간을 투여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아이들의 위한 쉼 공간이라는 목적은 100% 착실히 달성하고 있다.
우악청 문은 항상 열려 있어요.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해서 밤 10시 이전에는 집에 가는 것으로 결정했죠. 물론 시험 기간에는 시간을 좀 더 주고요. 직접 청소도 하라 해서 몇몇 애들이 한 번씩 와서 쓰레기 정리도 해주고 그래요. 여기서 각자 공부도 하고 프로젝트 과제 같은 거 있으면 모여서 하고. 학교 끝나고 저녁 먹고 가는 애들도 있어요. 집에 가도 챙겨줄 어른이 없거나 자기 공간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공간이죠.
청소년을 위한 정책은 없다
우악청이 있기 전, 근처 면사무소 주차장이나 버스정류장에서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친구들을 만났다는 아이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사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인구 소멸을 마주한 지역 지자체가 아동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는 갖가지 정책을 펼치면서, 미래의 유권자이자 중요한 시민이 될 청소년을 위한 정책은 거의 전무하다니. 그나마 존재하는 청소년 정책도 입시 위주 정책이 대부분이며, 그 정책마저도 공부 잘하는 학생 몇 명에게 집중되는 형편이라고 했다.
하동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올해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에 몇 명이 갔다’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입시 위주로 지원이 집중될 수밖에 없어요. 하동군 하동읍에 고등학교 2개, 옥종읍, 진교읍에 각각 고등학교가 있어요. 청소년이 없는 게 아니죠. 하지만 입시 위주로 정책을 만들면, 정책의 수혜는 10%의 아이들에게만 갈 뿐이에요.
하동군에 청소년수련관이 하나 있기는 해요. 하지만 하동군 산하에 있는 조직이라 아이들이 자유롭게 참여하거나 활동하기가 힘든 구조예요. 동아리 활동증명서나 봉사점수를 하동군에서 주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청소년수련관에서 활동하는 청소년들이 군에서 하는 이런저런 대외활동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아요.
로이는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아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다음 선거의 유권자이자 지금 하동에 사는 청소년들이 목소리를 내야 지역 사회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로이. 하지만 청소년 스스로 단체를 만드는 것도,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을 갖는 것도 쉽지가 않다.
이런 공간이 생기면 당장에 아이들이 생산적으로 이것저것 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처음 이 공간을 만들었을 때 ‘여기서 뭐 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 시키지 마세요’라고 했어요. 뭘 물어도 잘 대답도 안 하고 그랬죠. 지역 청소년이나 아이들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일회성으로 치고 빠지는 경향이 있어요. 장기적으로 아이들 성장을 미리 그림 그리면서 계획하는 프로그램들이 아니죠. 그러다 보니 참여하는 아이들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해요. 참여도 잘 안하고요. 그건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어른들이 잘못한거예요.
우리 아이들 ‘말’이 늘었어요
우악청은 일회성 지원과는 달랐다. 한 번 열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1년 동안 늘 한결같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아이들은 맞이 했다. 아이들도 이 공간을 연 어른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그 마음에 반응하듯 아이들은 우악청에서만큼은 어른들 말에 귀 기울였다. 더디기는 했지만 아이들에게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로이는 그 변화를 ‘아이들의 말’에서 확인하고 있었다.
어제오늘은 비교를 못하겠지만 1년 전하고는 정확하게 비교가 돼요. 특히 우악청 애들이 말이 정말 많이 늘었어요. 처음에는 여기 앉아 얘기를 해도 인사 정도만 하고 뭐 물어봐도 ‘네네’ 이 정도였는데, 지금은 여기 오면 친구들이 모여 있으니까 자기들도 편한지 말이 끊이지가 않아요. 한 마디 하면 여기서 두 마디 걸고 세 마디, 네 마디, 그렇게 해서 좀 시끄럽기는 하지만(웃음) 아이들이 자꾸 입을 뗀다는 건 정말 큰 변화예요.
얼마 전 아이들에게 우악청을 어떻게 운영하면 좋겠냐고 물었어요. 지금까지 저희의 개입 없이 아이들이 마음대로 공간을 썼는데, 그러면서 불편한 게 있었나 봐요. 이제는 공간 사용 규칙도 만들고 운영위도 꾸리겠다고 하더라고요. 한 공간에 모여 아이들끼리 복작대다 보니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 같아요.
우악청이 문을 연 지 이제 1년. 말이 없던 아이들이 말이 늘고, 수동적으로 공간을 사용하던 아이들이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자 한다. 이제 막 시작된 아이들의 작은변화가 앞으로도 지속되기 위해서 로이는 우악청이 ‘아이들이 더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게 제일 좋죠. 옆에서 어른들이 이거 해볼래? 저거 해볼래? 하기 보다는요. 그러려면 아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요. 지금 우악청은 10명만 모여도 비좁은 공간이에요. 안에서 교육 프로그램 하나 진행하기도 버겁죠.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악기도 배우고, 춤도 추고 그런 공간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아이들이 공간에 흥미를 느껴 찾아와야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활동도 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로이와 나누는 대화는 유쾌했지만 종종 마음 아프기도 했다. 청소년 정책이 성적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고 그중 소수에게만 모든 기회와 혜택을 집중한다 것, 아이들이 지역이 변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에 다른 도시로 떠나기를 늘 바란다는 것, 그리고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이것이 비단 하동군 악양면만의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막막한 현실에도 그나마 위로가 되어 주는 것은 대화 속에서 발견한 아이들의 변화였다. 더디긴 하지만 말이 늘고, 하고 싶은 게 하나하나 생기기 시작한 아이들. 우악청이 싹 틔운 아이들의 변화가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되어, 우악청이 더 복작거리고 시끄러워지길 기대해 본다.
😍 우리는 악양 청소년 짤막 인터뷰 : 우악청이 생기고, 우리에게 생긴 작은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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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임현택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