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빨갛게 노을이 타고 있어요~”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 주축이 된 초급반 레슨시간. 우쿨렐레 특유의 상냥한 음색에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가 어우러지니 마음이 다 환해진다. 구경꾼에겐 절로 미소가 피어나는 풍경이건만, 아이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기만 하다. 악보를 외우지 못한 아이는 악보를 쫓느라, 코드 전환이 익숙지 않은 아이는 작은 악기 위에서 길 잃은 제 손가락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교실 벽면에 게시한 우쿨렐레 동아리 규칙과 조직도가 눈길을 잡아끈다. 못하는 친구 도와주기, 수업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자기가 맡은 역할 잘하기, 악기 소중히 다루기…. 소박하지만 하나같이 소중한 약속들이다. 악기 정리, 악보 정리, 간식 준비, 서기, 리더 등 세세하게 나눈 임무는 동아리 구성원 모두에게 1인 1역으로 부과된다.
벽면에 일렬로 쭉 내걸린 십여 개의 우쿨렐레 가방 마다 아이들 이름표가 붙어있다. ‘나의 우쿨렐레’라면 저절로 아끼는 마음이 생길 터. 악기에 대해 책임감을 갖게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똑같아 보여도, 현주와 민욱과 여희의 우쿨렐레는 엄연히 다르다. 주인의 손을 유독 많이 탄 악기가 있는가 하면, 악기 연주보단 뛰어노는 게 더 좋은 주인 덕분에 새 것 같은 우쿨렐레도 있다. 무대 위, 작은 가슴에 꼭 안겨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새긴 우쿨렐레, 스텝이 엉킨 손가락으로 인해 소위 ‘삑사리’를 많이 낸 우쿨렐레. 어느덧 주인을 닮아가는 악기들이다.
“지금 초급반 레슨을 받고 있는 아이들은 작년 5~6학년 선배들의 우쿨렐레 연주 무대에 싱어로 참여했어요. 사실, 아이들이 고학년만 되도 노래를 잘 안 부르려고 합니다. 처음 배운 악기 연주에 노래까지 같이하는 게 어렵기도 했을 테고요. 한데, 공연을 몇 번 나가보니 노래가 영 아쉽더라고요. 연주만으론 좀 허전하고 심심하다 할까요? 그래서 저학년 아이들 몇 명을 싱어로 세웠더니 무대가 훨씬 풍성해지더군요. 작년엔 노래만 불렀던 이 아이들이 올해부터 우쿨렐레도 배우고 있습니다. 이젠 우쿨렐레를 제법 치는 고학년 아이들이 초급반 동생들을 가르쳐주기도 하지요.”
‘우쿨렐레를 통하여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이는 명현지역아동센터가 2년째 진행 중인 아티스트웨이 프로그램 타이틀이다. 작은 아이들 품에도 부담 없이 쏙 안기는 저 앙증맞은 악기가 일으킨 변화는 결코 작지 않았다.
작은 악기가 열어준 넓은 세상
우쿨렐레를 배우는 열댓 명의 아이들 중엔 음악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아이도 있고, 친구들과 함께 무언가를 배워나가는 동아리 활동에 의미를 두는 아이도 있다. 작은 무대에서나마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이며 주목받는 생의 기쁨에 눈뜬 아이가 있는가 하면, 목표 하나를 달성했다는 성취감에 만족하는 아이도 있다. 연습량은 곧 명징한 연주로 증명되는 바. 정직한 노력으로 맺어지는 결실을 손끝으로 경험하며, 아이들은 단단하게 여물어간다. 악기 하나를 배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큰 세계와의 만남이었다.
“명현지역아동센터가 위치한 지역은 오래된 자연부락으로, 대구광역시로 편입되기 전엔 달성군에 속했던 동네입니다. 달서‧성서 공단과 인접한 지역이라 아이들의 부모님은 공단 현장직, 일용직 근로자로 생계를 이어가며, 한부모 또는 다문화 가정도 많습니다. 생업에 급급하다보니 방과 후 아이들 교육에 신경 쓸 여력은 없는 형편이죠. 그러다보니 같은 학교에 다니는 인근 아파트촌 아이들과 교육의 격차가 큽니다. 가령, 학교에서 학예발표회를 할 때, 우리 아이들은 앞에 나서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자연히 위축될 수밖에요. 그래서 아티스트웨이를 신청했습니다. 악기 연주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 속에 아이들이 성취감을 맛보길, 친구들과 협주를 통해 건강한 사회성을 키워나가길, 자존감을 향상시키길 바랐습니다.”
우쿨렐레 강습은 아이들이 선택한 프로그램이었다. 기타보다 배우기 쉽고 흔치 않은 악기라는 데 흥미를 느낀 까닭이다. 그렇게 아이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꾸린 동아리지만, 아이들이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악기를 배운다는 건 녹록치 않은 수련과정을 포함한다. 악보를 읽고 운지법을 익히고 코드를 외우려면, 시간을 들여 반복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손가락이 아프다고 투정 부리는 아이, 레슨 시간이 다 되도록 친구들과 노느라 감감무소식인 아이…. 우쿨렐레 보다 노는 게 더 좋은 아이들을 다독여 프로그램을 진행하느라 초반엔 골머리 꽤나 앓았단다.
아이들이 달라진 건 무대를 경험하고 부터다. 올해 봄부터 달서아동문화축제, 멘토링페스티벌 등 제법 규모있는 지역축제에 참가했는데, 그 몇 차례의 무대 경험이 동기 부여가 됐던 모양이다. 아쉬운 무대 뒤엔 눈물을 쏟기도 했고, 다음 공연을 기약하며 저들 스스로 연습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전에 없던 의욕과 활기가 감돌았다.
“첫 해엔 아무래도 강습 위주로 진행하다보니 흥미를 이끌어내는 데 부족했던 거 같습니다. 아이들 입장에선 처음 배우는 악기가 힘들기도 했을 테고요. 2년차인 올해는 작년과 확실히 다르네요. 악기가 손에 익으니 연주하는 맛도 느끼는 것 같고, 크고 작은 무대를 경험하며 자신감이 붙었다할까요? 작년부터 우쿨렐레를 배워온 고학년 아이들이 올해 처음 악기를 배우는 초급반 동생들을 직접 가르치며, 자긍심도 생긴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경험 자체가 긍정적인 자극이기도 하고, 그 새로운 관계맺음 속에서 아이들끼리 더 친해지는 효과도 있네요.”
우쿨렐레 동아리는 축제 무대 외에 무료급식소나 노인복지관을 찾아 위문공연을 올리기도 한다. 손자손녀 같은 아이들이 기타 모양의 장난감처럼 작은 악기를 들고 노래한단 자체만으로도 반응은 최고조. 소박한 무대일지언정 진심에서 우러난 박수와 환대의 경험은 아이들 내면에 보람과 긍지의 자양분으로 차곡차곡 쌓여간다.
지난 2년, 명현지역아동센터의 아티스트웨이 프로그램은 움츠린 아이들에게 멍석을 깔아주는 일이었다. 구르고 뛰고 얼마든지 활개 쳐도 좋다고, 네 안의 열정과 잠재력을 깨워 신나게 놀아보라고 북돋워주는 널찍한 멍석.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를 위해 깔아놓은 폭신한 매트처럼 안전한 그 멍석 위에서, 아이들은 숱한 첫 걸음을 뗐다. 때로는 주저하고 때로는 성큼성큼 나아간 그 걸음들이 아이들의 꿈을,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를 확장시킨 것은 분명해 보인다.
글 고우정 l 사진 임다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