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건강할 권리를 찾기 위한 3년의 여정”
– 생계형 건강보험 체납자 지원사업 보고회 –
연말이면 등장하는 기사가 있다. 바로 건강보험 고액 체납자 문제다. 덕분에 건강보험 체납자는 모두 파렴치한 불성실 체납자라는 인식이 강하다. 4년 전, 이 생각에 의문을 던진 두 시민단체가 있다. 아름다운재단과 건강세상네트워크이다. 두 단체는 힘을 모아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을 던졌다. “생계의 어려움으로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현실은 상상 이상이었다. 216만 세대, 최소 405만 명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보험료를 내지 못했다. 건강보험은 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순간 사회보장제도가 아니라 가혹한 징벌제도로 바뀌었다. 생계형 체납자들은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거나, 가혹한 추심에 시달리거나, 최소 생계비까지 압류당하는 등 기본권을 침해당해왔다.
이 부당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3년 동안 진행되었던 <생계형 건강보험 체납자 지원사업>의 마지막 보고회가 지난 11월 23일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그간 함께 뛰어온 당사자, 활동가, 연구자, 상담가가 모여 그간의 소회를 나누었다. 첫 시작을 연 건 건강세상네트워크의 강주성 공동대표였다.
“제가 싫어하는 광고가 있어요. ‘이 생명을 구해주세요. 한 달에 만 원’이라는 광고에요. 원인을 이야기하지 않고 돕기만 하는 건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같죠. 그런 의미에서 <생계형 건강보험 체납자 지원사업>도 어쩌면 쓸데없는 일입니다. 체납자 전부를 구제한다 해도 체납 가구가 100만, 200만 계속 생길 테니까요. 그런데도 꼭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야 현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행복과 건강을 지켜줄 국가의 의무’가 얼마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지 드러낼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지난 3년 동안 해온 일은 쓸데없는 일이면서도 결코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 강주성 (건강세상네트워크 공동대표)
이어 유평화 활동가(건강세상네트워크)의 활동 보고가 있었다. 그는 3년의 활동을 “듣다, 더하다, 쓰다, 말하다”로 정리했다.
◎ 듣다
– 상담센터 운영으로 1,700여 명의 목소리를 듣고 당사자 고통 덜어줘
– 권리찾기모임으로 당사자의 힘과 목소리 키워
먼저 <생계형 건강보험 체납 피해 사례 상담센터>를 만들어 1,700여 명의 당사자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를 통해 실효성 있는 대책을 찾아 나갔고, 당사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덜어주었습니다. 덕분에 아픈 아이가 있던 한 20대 한부모 여성은 잘못 부과된 체납금 140만 원을 돌려받았고, 병원 진료가 시급했던 60대 노숙인은 체납금을 결손 처분(탕감)받아 치료를 받았습니다. 당사자의 힘을 키우는 자조 모임 <톡톡 카페>도 결성했습니다. 이 모임은 지난 3년간 당사자들이 활동에 적극 나서게 만든 마중물이 돼주었습니다.
◎ 더하다
– 210명에게 <60일의 건강보험증> 선물해
<60일의 건강보험증>은 60일 동안 병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1회분의 체납금을 지원하는 사업이었습니다. 이로써 2년 동안 210명이 잠시나마 마음 놓고 병원을 이용할 수 있었고, 그중에는 건강검진을 받아 중증 질환을 발견한 참여자도 있었습니다. 단순 지원에 그치지 않도록 상담과 캠페인을 통해 ‘누구나 건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활동도 함께 지속했습니다.
◎ 쓰다
– <생계형 건강보험 체납자> 연구로 제도 개선의 발판 만들어
– <건강보험 체납 상담 가이드북>으로 체납자 권리보호 기틀 마련
지금까지 생계형 건강보험 체납자에 대한 분석과 연구는 단 한 차례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연구팀은 건강보험에 대한 양적, 질적 조사를 통해 생계형 체납자가 216만 세대에 달한다는 사실을 처음 세상에 알렸습니다. 이 연구 결과는 이후 국회토론회와 국정감사, 언론을 통해 알려져 제도 개선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또 사회복지 현장에서 체납 상담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가이드북도 발간했습니다. 가이북은 올해 안에 전국 시, 구, 군의 사무소로 배송될 예정입니다. 이를 토대로 현장 활동가 교육도 진행했습니다. 이로써 상담센터를 통해 쌓은 3년간의 노하우를 확산해 더 많은 생계형 체납자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틀이 만들어졌습니다.
◎ 말하다
– 당사자 목소리로 만든 소식지와 집단민원신청
– 지속적인 언론 보도로 제도 개선까지 끌어내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당사자의 목소리였습니다. 함께 목소리 내기 위해 ‘결손 처분을 위한 집단 민원 신청’을 하고, 국민건강보험공단 앞에서 기자회견도 했습니다. <톡톡 뉴스>라는 당사자가 직접 만든 소식지와 토론회, 지속적인 언론 보도는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생계형 건강보험 체납 문제’를 뜨거운 이슈로 만들었고, 문제적인 몇몇 제도를 개선하게 만든 토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사업 참여자의 생생한 목소리 “나만의 문제가 아닌 모두의 문제”
활동 보고 후에는 더 생생한 활동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이어졌다. 당사자이자 활동가였던 ‘다흰’은 이 사업을 통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저는 당사자였어요. 체납자가 되기 전까지는 저도 건강보험공단이 어떤 곳인지 전혀 알지 못했어요. 한부모 가장이 되고 보험료를 체납하면서 공단이 국민 건강을 지키는 역할보다는 체납금만 걷는 데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상담 전에는 스스로가 무능력하고 의지박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담과 자조 모임을 통해 이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가장 큰 문제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구제 방법은 안내하지 않고, 독촉만 반복하는 현실을 꼽았다. 금융복지상담사인 정정화 씨 역시 답답함을 토로했다.
“채무 문제로 상담하는 사람 중 80%는 건강보험 체납자에요. 취약계층은 탕감 방법이 있는데도 아는 분은 2%도 되지 않아요. 공단과 상담해도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내라는 얘기만 하는 거죠. 이 상황이 답답했어요. 다행히 지난 3년 동안 구제 방법을 알려주고, 체납자도 건강할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 <생계형 건강보험 체납 피해 사례 상담센터>가 있어 숨통이 트였습니다.”
연구자인 김선 씨는 “무엇보다 큰 문제는 건강보험료가 체납되면 다른 사회보장제도가 모두 무력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사회보장제도를 연구해온 자신조차 이 사실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며 이를 알리면 모든 연구자가 놀란다고 말했다.
“건강보험료를 6개월 이상 체납하면 보험급여를 제한 당하는데요, 그러면 결과적으로 다른 의료 지원도 받을 수 없게 돼요. 보험료가 제한되면 병원비가 비쌀 거라는 두려움으로 병원에 못 가는 분들이 많아 증빙에 필요한 진단 자체를 받을 수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통장을 압류하면 근로장려금 같은 다른 정부지원금도 받을 수 없게 돼요. 결과적으로 건강보험료가 체납되면 의료 서비스뿐 아니라 다른 사회 보장 지원도 받을 수 없어요. 이게 바로 건강보험 체납 후 제재 조치가 문제적인 이유입니다.”
3년간 일궈온 유의미한 변화
직접 생계형 체납자와 상담을 해온 유평화 활동가는 이런 막막한 현실 속에서 일군 유의미한 성과들을 이야기했다.
“그동안 제재를 완화하거나 구제 방법을 명시하게 하는 등 소기의 제도적 성과가 있었어요. 특히 납부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가 연대납부의무에서 벗어나도록 바뀐 것은 꼭 필요했던 변화고요. 이전에는 두 살 아이에게까지 독촉장이 날아간 사례가 있었어요. 바뀌어야 할 부분은 더 많지만 제도 개선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무엇보다 <건강보험 체납 상담 가이드북>을 만들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현장 복지 활동가들이 ‘건강보험 체납 문제 해결하기 너무 어렵다, 모르겠다, 못하겠다’라고 방법을 알려달라고 요구하셨거든요. 이 책이 현장의 많은 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드릴 거라 기대합니다.”
제도 개선뿐 아니라 당사자들의 인식 변화도 컸다. 당사자였던 다흰은 이 사업을 통해 “우리가 목소리를 내야 바뀐다는 소신이 생겼다”라고 한다.
“난생처음 시위 현장에도 가고, 1인 시위도 해보면서 ‘변화를 위해서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소신이 생겼어요. 이제는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막대기라도 휘둘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게 저의 변화에요. 앞으로도 계속 ‘누구나 건강할 권리가 있는 사회’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이 자리를 마지막으로 ‘누구나 건강할 권리가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3년의 여정은 막을 내렸다. 끝으로 연구자인 김선 씨는 이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그래서 사업은 끝났지만 활동은 끝나지 않았음을 말했다.
“사업을 마치며 반성하는 게 하나 있어요. 체납자를 불쌍한 사람으로 타자화해 온 건 아닌가 하는 반성이에요. 앞으로는 ‘누구나 체납자가 될 수 있다’와 같이 모두가 각성하는 방식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체납자든 누구든 건강할 권리가 있다는 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에요. 그 당연함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계속 노력할 거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글 우민정ㅣ사진 조재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