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혁명 이후 시민들의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일상의 민주주의’ 담론이 확대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정치와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더 이상 일종의 전문가집단인 시민단체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 시민사회와 아름다운재단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아름다운재단은 시민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변화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역할과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협력사업팀은 그 힌트를 얻기 위해 지난 7월 영국 런던으로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영국의 비영리기관들을 방문하여 시민교육, 시민참여의 전략과 사례, 재단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름다운재단이 시민들의 참여와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영국 8개 기관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
피어투피어 모델의 실험
Participatory City Foundation(이하 PCF)은 주민 참여를 증진시키기 위한 생태계 조성을 실험하기 위해 2017년 설립된 재단이다. 현재 런던의 자치구 바킹앤대거넘(Barking & Dagenham)에서 5년 동안 120억 원 예산을 투입하는 대형 프로젝트 <Every One Every Day>를 추진하고 있다.
설립자 테시 브리튼(Tessy Britton)은 우연한 기회에 피어투피어 모델(peer-to-peer model. 주민들이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 우리나라의 품앗이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피어투피어 모델이 지역사회 관계망 형성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매우 효과적인 접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례들이 지속되지 못했다. 주요 원인은 주민들에게 매우 높은 수준의 참여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자금이나 공간 제약, 주민들 간의 의사소통, 정부나 지자체와의 관계 등이 지속성을 방해했다.
PCF는 7년간의 연구를 통해 이런 단점을 보완하고, 어느 지역이든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지속가능한 피어투피어 모델을 개발했다. 이는 누구나 쉽고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주민주도형(bottom-up)과 재단주도형(top-down)의 중간을 지향한다. 어느 공동체에서나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그룹은 5% 이내이다. 나머지 95%는 바쁘고 귀찮아서, 어렵고 힘들 것 같아서 등의 이유로 참여하지 않는다. PCF는 이런 주민들을 위해 쉽고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주민참여 인프라와 생태계를 만들고, 장기적으로 지역사회의 약한 연대(weak ties)를 형성하는 것을 목표한다.
모델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주민들의 참여를 돕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 주민들의 프로젝트(참여 기회)가 만들어 진다 → 더 많은 주민들이 참여 한다 → 참여생태계가 만들어 진다.
<모두가 참여하는 생태계 14가지 원칙>
- 적은 시간과 기여
- 작은 비용 혹은 비용이 안드는
- 단순하고, 간단한(쉬운)
- 다양하고 많은 기회
- 가깝고, 접근가능한
- 비기너부터 전문가까지
-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 직접적이고 효과적으로
- 소개하거나 동행하기
- 가시적인 혜택
- (타겟팅하지 않고) 재능을 끌어오기
- 포괄적인 문화 양성
- 100% 개방 – 낙인없이
- 모두와 함께 프로젝트 세우기
PCF는 모델의 적절성과 효과성을 검증하기 위해 대규모의 지역 기반 실험을 추진하기로 했다. 2년간 펀더들을 설득하여 복권기금, 민간재단, 바킹앤대거넘 자치구 등으로부터 800만 파운드(약 120억 원)를 유치했다. 다수의 펀더들이 하나의 프로젝트에 공동으로 투자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펀드가 조성된 후 프로젝트 추진 지역을 선정했다. 여러 후보지 중에 자치구 위원회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던 바킹앤대거넘을 최종 선정했다.
바킹앤대거넘은 런던의 동쪽 끝에 위치한 자치구로 인구 22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범죄, 폭력, 빈곤 관련된 각종 사회 지표에서 1등을 차지할 정도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이다. 과거 45,000명을 고용했던 포드자동차 공장이 철수하면서 대량실업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동부 런던에 공공과 민간의 투자와 개발이 집중되고 있어 젠트리피케이션 등 급격한 변화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주민참여 플랫폼 <Every One Every Day>
PCF는 바킹앤대거넘 지역에서 3개월 동안 타당성 조사를 거쳐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가장 먼저 주민들의 참여를 돕는 온오프라인 플랫폼 <Every One Every Day>을 만들었다. 본부격인 웨어하우스를 포함해 총 5개의 에브리샵을 운영한다(1개 오픈 준비 중, 전체 30명의 직원이 근무). 에브리샵은 주민 교육을 실시하거나 주민들의 모임이나 활동이 진행되는 공간이다. 주민들은 오다가다 샵에 들러 이웃들과 대화를 나누기고,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직원에게 상담하기도 한다. 이웃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목공, 봉제, 도예, 쿠킹, 텃밭, 양봉 등 어떤 활동이든 시도할 수 있다.
<Every One Every Day>의 주민참여 플랫폼
- Every One Every Day의 디지털 플랫폼, 뉴스레터 등을 통해 정보 제공(프로젝트 참여, 제안 방법 안내 등)
- 자신에게 맞는 프로젝트 참여, 아이디어를 토대로 함께 프로젝트 만들기
- 온라인 접근이 어렵거나 아이디어 발전을 도울 수 있도록 오프라인 에브리샵 운영
- 프로젝트(부엌, 작업장, 창고 등)를 위한 유용한 공간 마련
- 실질적인 활동을 위한 자재 및 장비, 자원 제공(보조금 양식 작성이 필요 없음)
- 보험, 보건, 안전 준비와 관리
- 주민들이 교류하고 프로젝트를 만들고 참여할 수 있도록 축제, 워크샵, 비즈니스 프로그램 개최
PCF는 주민들에 직접 활동비를 제공하는 대신 공간, 장비, 교육 등을 제공한다. 웨어하우스는 주민들이 활동을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과 장비를 제공한다. 활동과 관련된 일체의 장비뿐만 아니라 대형프린터, 3D프린터 등도 마련되어 있다. 바킹앤대거넘 지역 주민이라면 누구나 이곳을 이용할 수 있다. 만약 필요한 장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PCF 직원에게 구매를 요청하면 된다. 한편 주민들의 활동과 관련된 행정 업무는 직원들이 전담한다. 주민들은 행정 업무의 부담을 덜고 이웃들과 만남이나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
PCF는 자신들이 주민들의 참여 동기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주민들이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언제든 이용할 수 있도록 참여 기회를 지속적으로 노출시킨다. 예를 들면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에브리샵을 열어 주민들의 대화나 교류를 촉진한다. ‘센터(center)’라고 하면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가게(shop)’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소셜미디어, 마을신문 등 온오프라인 채널을 통해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모두가 참여하는 생태계
주민들의 <Every One Every Day> 프로젝트 참여 동기는 매우 다양하다. 첫째, 공동 작업 공간이 필요해서. 둘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셋째, 변화를 빨리 만드는 일에 매력을 느껴서. 예를 들면 골목에 화단을 만들고 싶은 주민들이 있다. 주민 센터에 도움을 요청하면 응답을 받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주민들은 그 동안 흥미를 잃고, 다른 일 때문에 바빠진다. 그러나 PCF에 도움을 요청하면 빠른 시일 내에 모종과 장비를 사준다. 주민들은 한날 모여 화단을 만들고, 직접 만든 변화에 효능감을 느낀다.
프로젝트 성과는 기대 이상이다. 지난 15개월 간 주민 6,000명이 참여했고, 100개 이상의 활동을 진행했다. 주민들은 15,000시간을 이웃과 함께 보냈다. 이는 지역사회의 약한 연대 형성을 목표하는 PCF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표이다. 30-50대의 참여율이 가장 높았고, 남성보다 여성의 참여율이 높았다(18-24세 남성의 참여율이 가장 낮음). 참여자의 40-50%는 무직이나 파트타임 노동자, 정규직 노동자는 20%이다. 다양한 인종의 참여, 인종그룹 간 교류도 중요한 지표 중의 하나이다. 이 지역의 인종은 과거 포드자동차 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백인 노동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이들과 이주민들의 갈등이 빈번하다. PCF는 프로젝트가 인종 그룹 간 갈등 해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PCF는 프로젝트가 종료된 후에도 바킹앤대거넘 지역에서 주민참여 플랫폼 운영을 지속하고, 피어투피어 모델을 확산하기 위한 국제교육센터를 설립할 계획이다. 그러나 플랫폼을 유료화하거나 주민들의 활동을 일자리 창출과 연계하지 않는다. 주민들이 지금처럼 플랫폼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플랫폼을 운영비를 외부 펀딩으로 조달할 예정이다. 플랫폼은 도서관처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인프라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주민참여 플랫폼과 생태계를 통해 형성된 지역사회 관계망이 주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했다는 성과를 입증하면 추가적인 펀딩을 유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위해 해마다 성과를 측정하고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참고자료>
- Participatory City Foundation 홈페이지
- Every One Every Day 홈페이지
- Every One Every Day 성과보고서 (1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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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아름다운재단 허그림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