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균이가 오늘을 살게 하네요!
‘인연’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이거나,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다. 어떤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이고도 간접적인 힘이다. 보통은 천년에 한 번씩 지상으로 내려오는 선녀가 바위 위를 걷다가 나풀거리는 옷자락이 그 바위에 스쳐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 ‘겁’을 단위로 사용한다. 흔히 말하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에서 낯선 이와의 스침은 이러한 겁이 500번이나 반복된 결과다.
이것은 고된 시간을 함께해 온 안태균 이른둥이 부모의 뒷심 이론이다. 그들은 ‘함께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7천겁의 인연이라는데, 부부와 부모의 인연은 1만겁에 가까우니 얼마나 소중한 거야’라고 되뇌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비틀어지고 야속한 속을 다독이곤 한다. 1만겁을 죄다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정말 오랫동안 겹겹이 또 촘촘히 서로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아내였고 남편이었으며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부부가 품은 ‘가족 인연’은 만약 태균, 유진이가 이른둥이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몰랐을, 알았더라도 책에 쓰인 경구처럼 이해했을, 살아 숨 쉬는 진실이다.
2012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 이른둥이 가족캠프 드럼서클 프로그램 중 환하게 웃는 태균 ⓒ 아름다운재단
어려움을 함께 견딜 인연, 부부
“결혼한 지 14년 됐습니다. 너무 오래됐죠. 하하. 연애였던가 중매였던가.”
누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기보다는 ‘이 사람이면 웬만한 어려움은 거뜬히 이겨낼 것 같다’ 싶었다. 그래서 부대낌 없이 결혼했다. 그리고 5년 후 태균이와 유진이를 임신했다. 오래 기다린 아이들이라 마냥 기뻤다. 두 부부는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뱃속 아가들에 쏙 빠져 지냈다. 그렇게 아홉 달째를 맞이했는데 급작스레 양수가 터졌다.
“태균이랑 유진이는 이란성 쌍둥인데 35주 6일만에 세상에 나왔어요. 9개월 만에 태어난 거죠. 쌍둥이들은 워낙 일찍 태어나기도 하니까 그리 빠르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물론 둘 다 인큐베이터에는 있었죠. 그래도 어디가 아프다거나 그럴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어요. 한 달 먼저 나온 거니까 한 달을 인큐베이터에서 보호받으며 지내는 거라고 여겼죠.”
두 부부가 지닌 낙천성 때문이었다. 아주 긴박한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에 부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약간의 황달이 있었지만 열 달을 채워 태어난 애들도 겪는 일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부부의 믿음 덕분이었는지 아이들은 쉬이 건강을 회복했다. 백일, 돌잔치까지 병원에서 치르는 이른둥이들에 비해 경과가 좋았다. 스스로 건강을 치유할만한 힘을 가졌구나 싶어 부부는 안심했다. 한데 7개월이 쯤 되었을 때 태균이에게 예기치 않은 불운이 찾아왔다.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뇌수막염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뭔지 몰랐죠, 그때는. 나중에 얼마나 힘든 일들이 펼쳐질지 알게 되고 아빠로서 해줄 게 없으니 마음이 아팠어요. 재활치료를 받아야 하는 정도의 뇌손상을 입어서 지금까지도 계속 치료를 하고 있어요.”
마음의 귀를 열어준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
어떤 순간에도 서로를 믿어주며 힘이 돼 주기로 약속했는데 마음과 달리 사는 게 녹록치 않았다. 태균이가 아프다는 것이 왠지 자신들의 탓인 양 느껴지는 죄책감과 왜 내게 이런 순간이 닥친 걸까 싶은 원망이 뒤섞여서 마음 한켠이 자주 서늘해졌다. 누구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약간은 화가 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갑자기 들이닥친 불운에 대한 그들 나름의 항거였다. 하지만 어디에도 표현할 데가 없었다. 게다가 부부 앞엔 아픈 태균이를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지난 8년 동안 여러 치료를 받았어요. 태균이는 몸만 불편한 게 아니라서 물리치료, 인지치료, 심리치료 등을 다 해야 되거든요. 낮병원을 다니면서 정말 꾸준히 치료를 받았죠. 지칠 만도 한데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니까 그게 힘이 되더라고요. 아직도 태균이 얘기할 땐 울게 되지만…. 한창 지쳐있을 때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가 위로가 됐어요.”
재활치료를 다니면서 알게 된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는 태균이 엄마에게는 인위적이지 않은 치유력의 상쾌한 피톤치드였다. 이상한 숨구멍이라고나 할까. 물론 ‘재활치료비’라는 물리적이고 금전적인 지원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심리적인 든든함이 더 컸다. 다른 말로 바꾸면 그것은 ‘위로’였다. 뭘 어떻게 해서가 아니었다. 세상은 별 관심 없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됐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부부에게는 참 따뜻한 위로였다.
오늘 행복하기 위해 산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태균이가 장애를 지녔다는 게 무거운 짐 같았다. 부끄러운 건 아닌데 아이를 밖으로 드러낼 때마다 숨을 깊이 들이마셔야 했다. 사실 태균이는 참 밝은데, 너무 천진난만해서 문제될 게 없는데… 사회가 문제라면서 그 사회의 편견을 자신들에게서 거둬내지 못하는 부모의 자책은 생각보다 깊었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인데, 한 학년, 한 학년 올라갈수록 아이가 받아야 할 것들이 두렵고. 요즘 워낙 학교 폭력이 많으니까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매를 맞을 수도 있잖아요.”
아직은 닥치지 않는 순간을 미리 걱정하는 게 태균이를 위해서라고 말했으나 잘 들여다보면 그건 부부의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태균이를 무조건 보호하려는 태도보다는 자립을 고민한다. 아이의 건강한 홀로서기를 위해 ‘지금-여기’에서 필요한 수순을 밟고 있다.
“현재 가장 필요한 건 대화예요. 태균이가 어떤 마음인지는 물론이고 아내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유진이는 잘 지내는지… 알 수 있는 건 대화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아내는 낮병원 다니느라 저는 열심히 돈 버느라 정신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하는 건 오로지 태균이, 유진이 쌍둥이가 행복했으면 바라기 때문이잖아요. 저희 부부도 함께. 그걸 잊지 않으려고요.”
간혹 두려움이 엄습하면, 내일이 흐릿하게 느껴지면 태균이가 첫 발을 떼던 순간, 다시 걷기 시작한 그날을 떠올린다는 부부. 뭔가에 가로막혀 있을 때, 서로 티격태격할 때 ‘태균이의 내일’이란 기준이 훌륭한 해법을 제시하더라는 그들은 이제 먼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희생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곁에 선 이들이 웃어야 진짜 행복이라는 걸 태균이의 성장을 통해 배워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