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씌운 ‘낙오자’라는 착각
가장권(家長權)의 주체가 되는 사람을 가부장(家父長)이라고 부른다. 가족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는 가부장을 반드시 아버지가 수행하진 않지만 대개 생물학적 남성에게 이 권리가 승계된다. 오랜 시간을 지내며 인류는 가부장제를 보편적 가족 형태로 용인했고, 세기와 인식이 바뀌며 다양한 논의가 진행돼도 이것은 꽤나 굳건한 편이다. 사회 전반적인 맥락에서 실재와 상징을 오가며 물리•심리적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호주제를 폐지하고 가족관계등록법을 시행한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한부모 여성가장의 공통분모쯤 되는 배경이다.
“스스로 초라해지는 느낌이 있어요. 그렇게 느끼지 않아야 하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힘든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내 자신이 초라해져요.” 올해로 한부모 여성가장 10년차인 최영란(가명) 씨가 운을 떼자 11년차 김숙진(가명) 씨가 덧붙인다.
“될 수 있으면 말을 숨겨요. 쟤는 어떻게 했기에 이혼하고 사나, 이런 말 듣는 것도 그렇고요. 나 자신이 실패한 것 같아요. 잘 살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서요. 솔직히 남편이 바람이 나서 이혼을 했는데 내 잘못도 아닌데 말이에요.”
인천남구미추홀지역자활센터에서 만난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특별한 건 아니다. 한부모 여성가장이 되는 순간 주변으로 밀려난다. 이른바 주류의 삶 가장자리에 서서 밖으로 내팽겨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며 살아간다. 가정을 지키며 돈을 벌어오던 ‘아버지’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을 대체한 여성 가장이 꾸린 가족 형태가 보편적 삶에서 뱉어져서다. 먹고 살 돈이 충분하다면 그나마 낫다. 가난마저 끼어들면 상황은 악화된다.
“마음 힘든 건 참을 수 있어요. 정말 힘든 건 경제적인 부분이에요. IMF 때 직장에서 남편과 함께 해고되고 문구점을 크게 열었는데 사별 후 혼자 꾸리기 어렵더라고요. 정리하고 친정으로 들어간 뒤 자격증 따려고 컴퓨터 학원에 다녔죠. 경력이 단절돼서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그때 한부모 여성가장 분들이 동사무소를 가보라고 알려줬고 겨우 일자리를 찾았어요. 한참을 헤맨 끝에 일하니 좋았죠. 한데 그 벌이란 게 참 그래요. 남자 벌이와 여자 벌이가 다르잖아요. 맞벌이하는 집의 1/4을 벌어 아주 기본적인 것만 해결하며 지내고 있어요.”
최영란 씨 말처럼 소득 양극화와 절대빈곤, 무한경쟁의 자본주의가 팽배하고 높은 실업률과 비정규직이 뒤엉킨 21세기의 가난한 한부모 여성가장은 갈 곳이 없다.
“막막하니까 혼자서 이거저거 해봤죠. 매일매일 부업이란 부업은 다 했는데 고생만 했죠. 그러다 올케가 동사무소를 알려줬어요. 기초생활보장제도도 그때 알았죠. 일자리를 소개 받고 보육원에서 조리사 보조 일을 시작했어요. 다섯 살 난 아이랑 같이 출퇴근하니 좋더라고요.”
김숙진 씨가 유난히 정보력이 떨어지는 경우는 아니다. 경제적 기반이 전혀 없는 한부모 여성가장이 기초생활수급을 신청하러 동사무소에 들르기까지 수년이 걸린다. 이 모든 상황을 실패로 인식하고 고립되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결핍이 관계의 결핍과 맞물려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는 것이다.
지지체계로 재갈과 밧줄을 끊다
“예전엔 다른 사람과 얘기 잘 안 했어요. 한부모라는 것도 안 말하고. 괜히 무시하니까요. 간혹 남편도 없이 수급자로 나랏돈 먹으면서 산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어요. 내 사정은 모르는 사람들이 ‘00 수급자 됐대. 왜 수급자로 살아, 창피하게’ 말하면 위축되고 화나고. 그래서 입을 다물죠. 그런데요, 저 진짜 열심히 살거든요. 게으르지도 않고 세금도 낸다고요.”
김숙진 씨가 상처받은 순간을 되짚는다. 철학자 고병권 씨가 이야기한 ‘찢어진 옷이 아니라 찢어진 옷을 신경 쓰는 것이 가난’이랄까. 그저 일어난 일들에 도망자처럼 숨어 다녔다. 한부모 여성가장이란 역할이 신경 쓰였다. ‘찢어진 옷’이라는 손가락질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보이지 않는 재갈과 밧줄의 위력은 대단했다.
최영란 씨도 다르지 않았다. 남편과 사별하고 여섯 살, 네 살 난 딸 아이 둘을 데리고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결심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나 자활센터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한동안 제 힘으로 취직하겠다고 버티다가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자활센터와 연을 맺은 지 4년. 그날이 최영란 씨에겐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어린 딸 둘 걱정에 밤늦게 일하는 게 어려웠거든요. 한데 자활센터에서 소개받은 곳은 출퇴근 시간이 정확하고 주말에 쉴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더 일찍 문을 두드릴 걸 싶죠. 지금은 봉제 일을 하는데 어느 정도 기술을 습득했으니 이젠 자활센터를 나가도 취업 걱정을 덜 할 것 같아요. 그 어렸던 꼬맹이들이 이제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6학년이 됐답니다.”
근무하면서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자활센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자립 가능한 지지체계 만들기다. 누구한테도 얘기할 수 없던 문제를 털어놓고 ‘나도 뭔가 할 수 있구나’ 기운을 내도록 이끄는 게 목표다. 정체된 지점에서 제 안으로 숨어드는 한부모 여성가장이 밖으로 한 발짝 대 디딜 수 있도록 함께 걷는다.
의외성, 다른 내일을 귀띔하다
중요한 건 여기저기 구멍 뚫린 보트 위에서도 살 수 있다는 바람을 놓지 않는 것. 사면초가 진퇴양난의 한부모 여성가장에게 건강권 지원사업은 팔딱이는 희망이다.
“남편과 이혼하며 혼자 아이 둘을 키울 수 없어 큰 아이를 두고 왔어요. 한동안 연락하다가 끊어졌죠. 그런데 이번에 건강검진 받고 작은 딸이 수소문을 해서 제 언니를 찾았어요. 무사히 수술 끝내고 딸과 만났는데 얼마나 기쁘던지… 일곱 살에 헤어졌으니 11년만이죠. 내년쯤이면 함께 지낼 수도 있을 거예요. 너무 행복해요.”
김숙진 씨는 아름다운재단의 ‘한부모 여성가장 건강권 지원사업’이 마냥 고맙다. 건강을 돌봐준 것보다 생이별한 딸과 만날 계기를 마련해준 까닭. 더 이상 뻥 뚫린 가슴으로 살지 않아도 되니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가 하면 최영란 씨는 불안을 거둬냈다.
“누군가는 직장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또 다른 누군가는 배우자와 함께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저희는 그럴 기회가 없잖아요. 한 달 월급에 맞먹는 비용을 지출하기도 어렵고. 이런 기회를 얻어 건강을 확인받으니 안심이에요. 아직 어린 딸들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내고 싶네요.”
검진 받던 그날, 시설 좋은 병원에서 친절하고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다. 남편 없는 가난한 여자라는 수군거림은 없었다. 오랜만에 ‘최영란’와 ‘김숙진’으로 존재했고 존중받았다. 10여년 만에 비로소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기부자를 떠올렸다. 그들의 지지로 뚫은 ‘내일’이라는 시공(時空). 거기에 삶이 있다. 한부모 여성가장이 떠밀려 당도한 가장자리가 낭떠러지로 전환되지 않도록 눈을 맞추고 귀를 열어 빚은 소통이 그로서 연대(連帶)인 이유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씌운 ‘낙오자’라는 꼬리표를 떼어낼 가장 빠른 방법이다.
글. 우승연 ㅣ 사진. 임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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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재단이 바라보는 복지는 ‘사회로 부터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권리’ 입니다. 주거권, 건강권, 교육문화권, 생계권을 중심으로 취약계층의 사회적 안전망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은 지향을 담은 <한부모 여성가장 건강권 지원사업>은 <당신의햇살기금>을 기반으로 합니다. 노동력이 생계를 위한 유일한 자산인 여성가장에게 건강은 생계유지를 위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머니의 건강권은 가족 해체를 막고,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