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캐스트 <열여덟 어른이 살아간다>는 신선, 손자영 캠페이너가 진행하는 ‘신선하고 자연스러운 우리들의 이야기’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더 다양한 자립준비청년들의 삶과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고자 마련된 코너의 첫번째 게스트는 자신을 사랑하고,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립준비청년 승미 님입니다. 같은 보육시설에서 자란 승미님과 자영 캠페이너의 웃긴 에피소드부터, 여행을 다니면서 가치관이 변화된 과정까지 자립 10년차 승미 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저에게 보육원이 집이고, 가족이었어요.”

신선: 안녕하세요. 열여덟이 되면 보육원을 떠나 어른이 되어야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 <열여덟 어른이 살아간다>의 신선입니다. 91화부터는 자립준비청년을 초대하여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첫 손님은 자립준비청년 김승미 님입니다. 승미 님은 자영님과 같은 보육원에서 자랐고 자립 후에도 꾸준히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데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승미: 안녕하세요. 보호종료 10년 차 자립준비청년 김승미입니다.

신선: 목소리 출연이라도 부담스러울 수 있을 텐데 어떻게 팟캐스트에 출연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승미: 제가 자립을 시작할 때 이런 콘텐츠가 많이 없었고, 저 같은 선배를 많이 겪어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예전부터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자영: 먼저 저희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저부터 말씀드리면, 승미 언니는 편한 존재에요. 늘 동생들을 챙기거나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 사람으로서 살아왔는데, 언니 앞에 있으면 마냥 동생처럼 행동하게 되고 자연스러운 저를 보여주게 되는 것 같아 편해요.

승미: 제가 외동이지만 저에게 자영이는 친동생 같은 존재인 것 같아요. 걱정도 되고 무슨 일을 하던지 응원하게 되고, 밥은 잘 먹고 있는지 등 항상 계속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존재인 것 같아요.

팟캐스트 <열여덟 어른이 살아간다>를 진행하는  신선, 손자영 캠페이너와 자립 10년차 승미님

팟캐스트 <열여덟 어른이 살아간다>를 진행하는 신선, 손자영 캠페이너와 자립 10년차 승미님

신선: 승미님은 어떻게 보육원에 가게 되었어요?

승미: 초등학교 4학년 때 들어갔어요. 저희 시설은 거기서 나고 자란 친구들이 많은데, 저는 좀 특이 케이스였던 것 같아요. 흔히 누구나 겪는 과정 중에 하나인 부모님의 이혼으로 집안이 위태했고, 어린 나이에 빨리 사춘기가 와서 방황하는 시기가 있었어요. 부모님과 살지 아니면 시설에 갈지 선택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보육원에 대한 이미지가 어둡고 무섭고 그런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빠와 절대 못 산다’는 생각으로 시설에 가게 되었어요.

신선: 초등학교 4학년, 11살에 시설에 들어온 건데 힘든 점은 없었어요?

승미: 시설 오기 전이 더 힘들었어요. 많이 힘들고, 외로웠어요. 부모님 이혼 때문에 집에 아무도 없었거든요. 이렇게 11년 살다가 시설에 갔는데 또래 친구도 동생들도 많고, 친구들이 다 밝고 재밌게 놀더라고요. 같이 어울리면 정말 재밌고, 많은 가족들이 생겼구나 이런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자영: 저는 초등학교 때 외부 학원을 다니면서 다름을 인지해서 보육원에 사는 걸 숨겼어요. 승미 언니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고, 진짜 인사이더였어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한 것도 저희 보육원에 잘 없는 특이 케이스였는데 어땠는지 궁금한 것 같아요.

승미: 보육원에 사는 것이 숨기거나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쉽게 말하지 못한다는 정도였던 것 같아요. 어릴 때는 믿고 신뢰하고, 관계가 깊게 형성된 사람한테만 얘기해야 되는 일인 줄 알았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보육원 밖) 외부 학교를 다니면서 사귄 친구들 집에 자주 놀러 갔는데, 친구들도 저희 집에 초대하고 싶은 거예요. ‘나도 우리 집이 있는데, 우리 집에서도 재밌게 놀 수 있는데’ 이 마음이 컸어요. 야자 시간이었어요. 친구들 공책에 ‘나는 보육원에 살고 있고,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고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 너희들이 나를 미워할 것 같지도 않다’고 적었거든요. 친구들이 그걸 보더니 전부 울면서 그런 줄 몰랐다고, 얘기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후에 친구들이 저희 집(보육원)에 봉사활동을 왔고, 저희 보육원 동생들도 너무 좋아해주고 해서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꾸준히 와줬고, 지금도 계속 연락하고 지내고 있어요. 그때가 다른 사람한테 처음으로 얘기하는 순간이었는데, 첫 단추가 잘 꿰어져서인지 이렇게 얘기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신선: 이런 경험들이 중요한 것 같아요.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얘기했을 때 긍정적으로 반응을 해주니까 엄청 더 컸을 것 같아요.

자영: 승미 언니가 친구들한테 말했던 경험에 대해서 처음 들었는데, 좋은 친구여도 선뜻 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을 할 수 있었던 용기가 좀 궁금해요.

승미: 저는 보육원을 집이라 생각했어요. 보육원에 들어오기 전까지 저희 집은 집이 아니었어요. 그냥 자는 공간 정도, 보통 집이나 가족을 생각했을 때 그런 형태로 살아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소심하고 말도 못했는데, 보육원에 와서 친구들 만나면서 성격도 밝아지고 잠도 잘 자고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오히려 내가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거에 대한 부담이 없어졌어요. 내가 여기서 살아야 되고, 이제 나의 전부인 거니까 내가 이거를 굳이 뭐 부끄러워해야 되나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양육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자영: 같은 시설에서 자랐지만, 어떤 양육자를 만났는지에 어린 시절이 다를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좋았던 양육자 선생님이 매일 자기 전에 귓속말을 해주셨어요.  ‘자영아 오늘 설거지 도와줘서 고마웠어’ ‘엄마는 너가 있어서 힘이나!’ 저의 하루의 모습을 귓속말로 칭찬을 해주셨어요. 그때는 오글거리고 어색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사랑이라고 느껴지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선생님이 진짜 많이 기억이 나더라고요. 승미님도 기억에 남는 양육자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승미: 제가 만났던 분들은 다 좋으신 분들이었어요. 규칙을 지켜야 하는 시설에서 약간의 자유를 주시고, 방목 아닌 방목을 해 주셔서 제가 지금의 가치관, 성격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중학교 1학년 때 키워주신 선생님이 고등학교 1학년 때도 제 양육자 선생님이셨는데, 그 선생님과 다사다난한 일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희 학년 친구들에 대한 애정이 많으셨어요. 원래는 학년별로 살았었는데, 시설에서 고등학교 1학년부터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어요. 학년별로 지내니 언니 동생 사이에 위계질서도 심해서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학년을 골고루 분배를 해서 살았었는데 그때 저희 집이 사랑방이었어요. 저희 학년 친구들이 다 모여서 저희 집에서 같이 시험 공부도 하고, 야식도 먹고 했어요.  그때 기억이 또 좀 깊은 편이어서 뭔가 살아감에 있어서 저의 이런 좀 독립적이고 뭔가 자기 주장이 강하고 이런 가치관을 만들어줬던 그 베이스가 아마 그때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영: 같은 시설에서 자랐지만 어떤 양육자를 만났느냐에 따라서 다른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저는 걱정도 많고 수동적인 편인데, 승미 언니는 진취적이잖아요. 저와 같이 지냈던 양육자분들이 규칙을 되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인의 의견보다는 ‘이거 해야 돼’라는 분들이 더 많아서 기꺼이 뭔가를 해야 되는구나 늘 약간 책임과 의무 속에서 많이 살아왔던 것 같아요. 근데 승미 언니를 보살펴 주셨던 양육자는 그렇지 않는 것 같은데, 규칙 속에서 풀어주는 부분이 있었다고 했는데 어떤 부분이었나요?

승미: 시설에서는 각자 책상에서 공부해야 하고, 9시 이후에는 떠들면 안되고 등 규칙이 있거든요. 근데 저희집이 사랑방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저희 집에 애들이 다 같이 모여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시고, 떠들지 말고 공부하라고 해놓고서 괜히 간식 더 챙겨주시고 이런 것이 기억에 남아요. 원래 저희가 생활하는 공간에는 취사 시스템이 없었어요. 식당에서 다 밥을 먹고 올라오는 시스템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집에 가스레인지가 생긴 거예요. 집에 싱크대와 가스레인지가 생기니깐, 항상 주말마다 저희한테 직접 요리를 할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주말에는 장도 저희가 직접 보러가고, 파스타 같은 요리도 직접 해먹으면서 요리하는 게 너무 재밌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이제 곧 자립을 앞두고 있으니 자립 하기 전에 스스로 해 볼 수 있는 경험을 오히려 많이 주셨던 것 같아요.

신선: 보육원은 규칙이 정해져 있고, 선생님들도 규칙을 지켜야지라는 생각 때문에 요리나 이런 부분은 저희도 절대 못했어요. 위험하니까 가스 손대는 것도 못하게 하고, 칼질도 못하게 하고 하다 보니까 할 수 있는 요리가 없었거든요. 근데 승미 님의 선생님은 그런 규칙을 조금 풀어주면서 그 안에서 재량적으로 아이들을 양육했던 것 같은데 이런 선생님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모든 것을 혼자 헤쳐 나가야 되는 순간, 그 시작이 자립인 것 같아요. 

자영: 자립의 출발이 어땠는지도 좀 궁금해요. 그때 느꼈던 감정은 어땠어요?

승미: 저는 시설에서 지낼 때부터 좀 자유롭고 편하게 지내서 퇴소 했을 때는 시원섭섭한 감정도 있었지만, 친구들과 같은 회사에 입사하면서 같은 기숙사에 살아서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 같아요.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23살에 처음으로 자취를 하게 됐어요. 그때가 첫 자립이라고 생각하는데 첫 집에서 진짜 아팠던 적이 있었어요. 집에 나 혼자밖에 없는데, 약도 먹고 해야 되니까 혼자서 물에 밥 말아먹으면서 ‘내가 진짜 혼자구나’ 를 확실히 느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 전세 사기를 당한 거예요. 이사를 가겠다고 세 달 전부터 집주인에게 말했는데, 처음에는 못 주겠다고 하다가 다시 준다고 해서 이사 갈 집에 계약금도 내고, 이사 업체 알아보고, 입주하는 집청소도 하고 다 끝난 상태였는데 하루 전날에 못 주겠다면서 집주인이 잠수를 타버린 거예요. 그래서 계약이 엎어지고 다행히 그 이사 가는 집에 집주인 분이 좋으신 분이라서 계약금은 돌려주셨어요. 일단은 그 집에서 살아야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사는데 집에 들어가기가 싫은 거예요. 저한테 집은 되게 중요한 공간이거든요. 이거를 알려줄 사람도 없고 뭔가 해결해 줄 사람도 없고 이건 오로지 제가 해야 되는 거잖아요. 변호사 통해 내용증명 보내면서 잘 마무리되긴 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가 저한테 자립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뭔가 혼자 모든 걸 헤쳐 나가야 되는 순간의 시작점이 자립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때가 시작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신선: 그런 상황이었을 때 도움을 구할 사람은 없었어요?

승미: 없었어요. 제가 23살이니까 주변 사람들도 그런 거에 대한 정보나 지식 같은 게 좀 없었어요. 주변에서 이것저것 알아 봐주긴 했는데, 결론적으로 해결해야 되는 건 저니까 엄청 알아봤어요. 법무법인을 고용해서 변호사 통해 내용증명을 한 3회 정도 보내고 진짜 법원 가기 직전에 돈을 돌려받아서 잘 마무리되긴 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빚이 생긴 거예요. 법적으로 든 비용이 빚으로 남은 거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지’라는 생각도 들고, 모든 상황이 최악이었어요.

자영: 조금 가벼운 이야기로 넘어가서 승미 언니는 옆에서 보면 굉장히 여행을 많이 다녔더라고요. 왜 여행을 좋아하게 됐었는지를 이야기 나눠도 좋을 것 같아요.

승미: 전에 자영이가 인터뷰할 때 저에게 ‘행복의 기준’을 물어본 적 있었어요. 가고 싶은 데 가고, 하고 싶은 거 하고, 먹고 싶은 거 먹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는 게 저의 행복의 기준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TV나 책으로 본 공간을 직접 내가 보고 경험하고 하는 게 말로 표현은 할 수 없지만 진짜 뭔가 성공한 것 같았어요. 유럽에 가서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를 봤을 때 뭔가 가슴이 벅찼어요. ‘내가 성공했구나! 내 눈으로 모나리자를 봤구나, 이건 진짜 성공한 삶!’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시설에서 단절되고 정해진 틀의 삶을 살다가, 내가 선택하면서 경험하는 진짜 다양한 경험들이 신기하고, 그걸 통해서 가치관이 많이 바뀌거든요. 경험을 통해 생각이 많이 바뀐 것 같아 그것 때문에 여행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자영: 보육원을 나온 후 저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그려지지가 않아서 힘든 시간을 보냈거든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게 쉽지 않았는데 언니는 취미나 취향이 확고한데, 그것을 찾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어떤 팁을 얘기해 줄 수 있을까요?

승미: 인생 좌우명이 ‘하면 된다’거든요. 고민만 하면 해보지 않으면 결론이 안 나잖아요. 고민만 하다가 시간이 지나간단 말이죠. 그래서 그냥 고민할 바에 일단 질러보자 하고 항상 해봤던 것 같아요. 그렇게 했을 때 후회는 거의 없었고, 설사 후회를 하더라도 경험해봤기에. 가치관이나 삶의 방향을 찾는 기준이 될 수 있으니 다양한 경험들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신선: 오늘 함께해 주신 승미 님의 소감이 궁금합니다.

승미: 처음에는 긴장을 했어요. ‘내가 말을 잘할 수 있을까?’, ‘막상 갔는데 덜덜 떨면 어떡하지?’ 라고 생각을 했는데 셋이서 편하게 얘기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기도 하고, 이런 기회가 되면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 중에 한 명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항상 있어서 그런지 아주 뿌듯한 시간이었습니다. 자립하는 친구들에게 한마디 할 수 있다면 평범한 가족 생활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숨기거나, 의기소침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살아온 거에 대해서 편하게 받아들이고, 스스로가 먼저 당당하고 꺼려하지 않는다면 주변의 인식들도 변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리고 누구나 자립을 하니까 ‘나는 혼자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돌이켜보면 항상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혼자라고 생각할 때 주변을 둘러보면 분명히 좋은 사람이 옆에 있을 거예요.

자립 10년차 승미님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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