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야, 내 인생을 바꿔줘서 고마워. 내가 살아갈 힘을 줘서 정말 고마워. 너라는 존재로 이전에 몰랐던 진짜 행복을 알았어. 그저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좋겠어.”

‘119응급하우스’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기의 평화로운 얼굴. 그 위로 울려 퍼지는 엄마의 목소리가 촉촉하다. 오늘은 혜주(가명)가 태어난 지 60일째다. 혜주를 포근히 보듬고 있는 다희 씨(가명, 22세)의 앳된 표정에는 평온함과 안도감이 깃들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다희 씨는 청소년기본법상 청소년에 해당하는 나이로 당장 오갈 곳이 없었던 위기임신부였다. 수소문 끝에 다행히 전주 119응급하우스에 안착하게 되었고, 안전한 출산을 위한 주거 환경 속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로부터 100일쯤 후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날 생명을 보살피며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엄마도 함께 태어났다.

위기에 처한 청소년부모를 위한 119응급하우스

119응급하우스에서 맺은 생명의 결실

새해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다희 씨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았다. 아기의 아빠는 동거 중인 남자친구였다. 하지만 원래 결혼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 자녀에 대한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거기다 재정적으로 형편도 빠듯했다. 그래서 낙태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친구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구속재판을 받게 되고 말았다. 답답하고 막막했다. 그사이 집의 월세는 계속 밀려만 갔고, 더는 그 집에서 거주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급한 대로 친구에게 신세를 졌지만, 그도 잠시였다. 다시 살아갈 곳을 찾아야만 했다. 세상은 봄이라는데 온통 회색빛이었다.

“점점 배는 불러오지, 당장 오갈 곳은 없지, 걱정이 많았죠. 그래도 아기는 낳아야 하니까 인터넷에서 비혼모 관련 시설을 찾아봤어요. 여기 전주에는 ‘예람’이라고 청소년부모를 지원하는 단체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연락하고 방문해 사정을 설명 드렸더니 바로 119응급하우스로 안내해 주셨어요. 예상했던 비혼모보호시설이 아니라 독립적인 거주 공간이라는 말씀에 마음이 많이 놓였어요.”

아늑하고 안전한 독립주거공간 119응급하우스

천만다행이었다. 다희 씨는 119응급하우스에서 출산 이후까지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었다. 한숨을 돌리며 다희 씨는 성실히 산부인과 검진도 다니게 되었다. 태아에게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다만, 다희 씨의 혈압이 염려스러웠다. 정상 수치를 제법 벗어났기 때문이다. 의사는 임신중독증을 진단하고 약을 처방했다. 하지만 임신 37주로 접어들며 다희 씨의 수축 혈압은 180㎜Hg, 이완 혈압은 120㎜Hg을 넘어 버렸다. 위험한 상태였다. 다희 씨는 곧장 분만실로 향했고, 고된 수술 끝에 혜주를 출산할 수 있었다. 당시 혜주는 2.3㎏으로 저체중이었다.

“인큐베이터에서 처음으로 혜주를 만났어요. 호스 연결하고 움찔거리는 모습에 너무너무 미안했어요. 무엇보다 임신했을 때 출산을 고민했던 것이 미안했고요. 혜주 심장 소리 듣고야 뒤늦게 정신 차리고 몸에 해로운 습관들을 끊었어요. 그래서 미안해요. ‘밥도 때 거르지 말고 많이 챙겨 먹을걸’, ‘옷도 청바지처럼 조이는 복장 말고 편하게 입을걸’ 하는 후회도 했어요. 그랬으면 혜주가 저체중아로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진짜 미안해요.”

아가야, 내가 살아갈 힘을 줘서 정말 고마워

생명의 결실이 빚은 오롯한 모성

인큐베이터에서 열흘을 견딘 혜주는 건강하게 119응급하우스로, 다희 씨 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60일이 흐른 지금까지 다희 씨는 평온한 거주 환경 속에 혜주와 모녀의 교감을 쌓아가고 있다. 그맘때 엄마처럼 아기가 깨어나면 밤낮없이 보살피고, 잠들면 빨래하고 청소하고, 시간이 남으면 쪽잠 자며 육아에 전념하고 있다. 가끔 중요한 약속이 생기면 아이돌봄서비스를 지원받고 외출하지만, 그때마다 혜주에게 미안하고 불안해서 금방 돌아가고 싶다.

“일단 혜주랑 함께할 집이 있다는 점이 제일 좋아요. 그때그때 먹을 수 있고, 잠잘 수 있고, 씻을 수 있잖아요. 거기다 생계비와 아기용품도 지원해 주셔서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어요. 저와 비슷한 상황의 청소년부모라면 분명히 집이 우선일 듯한데요. 119응급하우스가 많지는 않다고 들었어요.”

실제로 다희 씨가 따뜻한 모성을 발현 중인 119응급하우스는 전주에는 올해 처음으로 개소했다. 아름다운재단은 2019년부터 ‘청소년부모지원 킹메이커’와 파트너십을 맺어 <청소년부모 주거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그 일환으로 전주 내 119응급하우스 거점을 마련하고자 ‘예람’과 힘을 모았다. ‘예람’ 강혜진 대표는 애틋함과 소명감으로 전주 청소년부모의 위기 임신과 출산 관련 긴급 지원을 위해 언제나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청소년부모에게 더욱 지원할 수 없어 안타까웠던 차에 119응급하우스를 통해 주거 환경을 제공할 수 있어 너무 감사했어요. 사실 임신한 청소년의 가정은 온전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보통은 가족과의 불화 속에 임신한 채로 거리로 나오곤 하는데요. 오갈 곳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같이 출산에 대해 엄청난 속앓이를 해요. 그래서 임신한 청소년에게는 안정을 회복한 후 건강하게 아기를 출산할 수 있는 주거 환경이 꼭 필요하죠.” (강혜진 대표)

전주 119응급하우스를 운영하는 예람 강혜진 대표

오롯한 모성이 움 틔운 희망의 삶

이제 2주쯤 후면 다희 씨는 긴급 주거 지원이 종료되고, 119응급하우스를 떠나 후속 지원을 안내받을 예정이다. 다희 씨는 임신 중반부터 출산 60일 후인 지금까지 그간의 여정을 돌아봤다. 119응급하우스 덕에 위태로운 상황을 벗어나 혜주와 살아갈 희망의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행복했다, 계속 머무르고 싶을 만큼.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청소년부모를 생각하면 기꺼이 이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 사실 다희 씨에 이어 전주의 119응급하우스에 거주할 새로운 청소년의 사연도 여간하진 않다. ‘청소년부모지원 킹메이커’ 배보은 대표에 따르면 예전에 낙태한 경험이 있다는 그 청소년은 이번엔 꼭 아기를 낳고 싶어서 전국 각지 비혼모보호시설의 문을 두드렸다고.

“우리나라는 임신기 관련 지원이 거의 없는 실정인데요. 전주는 더욱 열악해요. 그래서 임신한 청소년은 전국 각지에서 유관 지원 시설이 집중된 수도권으로 몰려와요. 아기를 출산하려고요. 하지만 친척도 친구도 없는 수도권에서 홀로 생활하기는 어렵고 힘들죠. 그 관점에서 지역의 자원을 연계한 119응급하우스의 확산이 요구되고요. 지역별 특성에 따라 지원 시기와 내용도 확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배보은 대표)

청소년부모지원 킹메이커 배보은 대표

배보은 대표의 메시지처럼 청소년부모에게 119응급하우스와 같은 주거 환경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기를 지우려던 청소년이 다시 출산을 결심할 수 있고, 아기를 떠나보내려던 청소년이 손수 양육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가치는 생명, 그리고 인생과 맞닿아 있어 숭고하기까지 하다. 이는 다희 씨를 통해서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다희 씨는 혜주라는 생명을 통해 엄마라는 세상을 맞이할 수 있었다. 혜주는 오롯한 모성을 일깨웠고, 삶의 용기를 북돋웠으며, 한없는 행복을 선사했다. 그 가운데 다희 씨는 새로운 인생의 여정 또한 설레도록 그릴 수 있었다.

“예전에 주로 헤어숍에서 일했었는데요. 앞으로 헤어 디자이너로 경험을 쌓아서 제 매장을 오픈하려고요. 어느 정도 시간은 필요하겠지만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그 사이 혜주 아빠가 돌아오면 육아를 맡기고, 저는 헤어숍에서 열심히 돈 벌어 자산을 마련해야겠죠. 추가로 혜주에게 바라는 점은 나중에 커플룩도 맞춰 입으면서 친구처럼 다니고 싶어요. 주변에 소문날 정도로 혜주랑 진짜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글. 노현덕 ㅣ 사진. 조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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