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까지 닿는 제도, 생활동반자

운영관리팀 박소연 매니저

2026.07.06

읽는 시간 0분

입사지원서에 ‘돌봄’을 썼던 지원자, 생활동반자 제도를 만들다

2022년 1월, 아름다운재단에 입사지원서를 냈습니다. 지원서 문항 중 하나는 ‘당시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비영리기관의 역할’이었는데요. 저는 ‘돌봄’이라고 썼습니다. 당시 코로나19가 한창이었고, 실직과 고립, 생계의 위기가 겹쳐지면서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1인분의 몫을 해내기 힘든 상황에서, 타인을 돌볼 여유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깊이 고민하고 쓴 문장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세상을 보며 솔직하게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 지원서를 쓴 제가, 3년 뒤에 ‘생활동반자 제도’를 만들게 될 줄 몰랐습니다.

[2022년 당시 채용응시서 3번 문항과 답]

생활동반자라는 단어를 처음 마주했을 때 

저는 아름다운재단 운영관리팀에서 조직의 복리후생 제도를 맡고 있습니다. 처음 생활동반자 제도를 수립하기로 했을 때만 해도 솔직히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아름다운재단에는 이미 경조사 휴가 기준표가 있었고 기존 혈연, 혼인, 입양 등 법적 가족 중심으로 지급하고 제공하던 경조사비, 경조사휴가 적용 범위에 ‘생활동반자’를 추가하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 첫 번째 질문부터 막혔습니다. 

‘생활동반자가 ‘정확히’ 뭘까?’ 

‘생활동반자’라는 단어는 법에도, 사전에도 공식 정의가 없습니다. 국회에서 발의된 법률안도 있었고, 시민단체마다 쓰는 정의도 조금씩 달랐습니다. 명확한 기준 없이 제도를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책을 사서 읽고,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한국여성민우회 자료를 들여다보고, DEL 세미나《포용하는 일터는 무엇을 바꾸는가》에도 다녀왔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알게 된 건, 이 개념은 단순히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단어’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혼인이나 혈연이라는 틀 밖에서도 서로를 돌보는 관계는 이미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이 있었습니다. 제도가 그걸 못 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가, 입사지원서에 제가 썼던 ‘돌봄의 공백’과 정확히 겹쳐 보였습니다.

1) 공부하고, 개념을 정의하기

공부를 마치고 나서 ‘생활동반자’를 재단 제도에 맞게 정의하기로 했습니다. 법률안마다 정의가 달랐고, 사회적 의미도 넓었습니다. 그 모든 정의를 그대로 가져오면 기존 복리후생 체계와 충돌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단의 맥락에 맞는 ‘조작적 정의’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혼인이나 혈연관계 외에, 한 사람과 동거하며 서로 부양하고 협조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 성인.”

전사 구성원 대상 생활동반자 설명회 PPT 발표자료 일부

그리고 그 안에서 유형도 나눴습니다. 동성 간의 결합인 ‘동성결합’과, 그 외 모든 시민적 결합인 ‘시민결합’으로요. 구분이 필요했던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동성결합은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합으로 결혼에 준하는 성격을 갖고, 시민결합은 그보다 넓은 범위의 삶의 동반 관계를 포괄합니다. 같은 ‘생활동반자’라도 관계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제도 적용 기준도 그에 맞게 설계해야 했습니다.

2) 기존 제도를 흔들지 않으면서 구성원을 신뢰하기

개념을 정의하고 나서야, 비로소 재단 규정에 있는 경조사 표를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기준표에는 결혼, 회갑, 사망 등 각 경조사별로 대상과 휴가 일수, 경조사비, 제출 서류가 촘촘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생활동반자를 추가한다는 건, 단순히 행을 하나 더 넣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경조사에는 적용되고, 어떤 경조사에는 적용되지 않는지. 적용 범위가 기존 배우자와 어떻게 같고 다른지 하나하나 따져가며 기준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제도의 허점도 찾아야 했습니다.

생활동반자는 현행법상 공식 서류가 없습니다. 가족관계증명서처럼 관계를 증빙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거기다 서류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원치 않는 정보가 노출, 즉 ‘아웃팅’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신경 써야 했습니다. 결국 재단 내부 신청서 한 장으로 대신하기로 했습니다. 구성원을 향한 신뢰를 기반으로 운영하자는 판단이었습니다.

3) 구성원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기 

제도를 다 만들고 나서, 또 다른 과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전사 구성원들이 이 개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생활동반자는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단어입니다. 좋은 의도로 만든 제도도, 개념 자체가 낯설면 오해가 생기거나 외면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범 사업 시작 전에 전사 설명회를 열었습니다.

전사 구성원 대상 생활동반자 설명회 PPT 발표자료 일부

배경과 개념, 조작적 정의를 한 이유, 생활동반자가 무엇인지, 동성결합과 시민결합은 어떻게 다른지, 기존 경조사 기준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표 한 줄 한 줄을 직접 설명했습니다. 구성원의 83%가 설명회에 참석했고, 공지 열람률은 72%였습니다. 낯선 개념에 대해 이만큼의 구성원이 함께 앉아 들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1%를 위한 제도

정책학을 전공하면서 첫 행정학개론 수업에서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경제학과 행정학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아냐고. 누군가 희생될 확률이 1%일 때, 경제학은 99%를 위해 계속 나아가지만, 행정학은 그 1%까지 고려하는 것이라고.”

그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생활동반자 제도 시범사업의 실제 신청은 ‘1건’이었습니다. 숫자만 보면 작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1건을 초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존 제도의 기준 밖에 있던 누군가가, 이 제도 덕분에 처음으로 지원을 받게 된 의미 있는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2026년 1월 1일, 생활동반자 제도는 정규 제도가 되었습니다. 이 제도의 출발은 2023년 내부 구성원들의 아이디어 경진대회인 이노베이션캠프의 ‘모던패밀리’ 팀이었습니다. 저는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제도로 옮겨 구체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입사지원서에 ‘돌봄’이라고 썼던 그때의 저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의 답을 써내려갈 줄 몰랐습니다.

사회 전체를 당장 바꾸지 못해도, 재단 안에서부터 그 1%의 자리를 만드는 일. 그것이 제가 이 일을 하는 이유입니다.

 운영관리팀 박소연 

목록으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