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아름다운재단에서 새 식구가 된 신입간사들이 짧은 수필(에세이)로 릴레이 포스팅을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포스팅의 주인공은 기금 데이터를 관리하고 기부자와 소통하는 일을 하는 특화나눔팀의 정희은 간사님입니다. 아름다운재단의 동네 주변(서촌 지역)에는 멋진 전시 공간이 참 많은데요. 대부분의 전시 일정을 꿰고 있는 정희은 간사님 덕분에 신입간사들은 다양한 전시회와 전시 공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아서일까요. 정희은 간사님의 글은 마치, 서울과 파리의 한복판을 껑충껑충 오가는 단편 소설 같은 느낌이 듭니다. 파리의 어느 살롱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사회, 정치, 예술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여인을 떠올려도 아주 잘 어울리는 간사님. 아름다운재단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어떤 생각의 풍경에 잠겼는지 함께 읽어볼까요?

올해 초 아름다운재단에 입사한 후, 새롭게 걷기 시작한 서촌을 매일 아침 거닐 때면 잠시 접어 두었던 기억의 편린들이 모아지곤 한다.

과거의 시간을 회귀시키는 기억의 공간은 미래를 향한 시작과 연결되어있다.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한 후 생쉴피스 성당과 랭보의 시가 적힌 벽이 있는 이 골목으로 가보세요. 그 주위 골목골목들이 아주 즐겁고 재미있어요.”

길가의 담벼락에 랭보의 취한배 시가 적혀있다.

몇 해 전 만추가 다가오는 가을 파리에서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사람이 있다.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이 찾아오는 시간에 파리의 산책 코스를 추천해 주었다. 변덕스러운 날씨로 지난밤 이슬이 내려앉았던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하면서 아침의 따뜻한 햇살을 쐬고 그녀가 안내해준 랭보의 시가 있는 골목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파리에서 맞는 또 다른 날의 아침시간, 일상과 여유가 함께여서 즐거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랭보의 시가 적힌 골목을 따라 걸으며 랭보를 생각했고, 우연히 마주친 생쉴피스 성당에서는 어느 프랑스 기업인의 장례식에서 박수를 치며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파리 시민들 모습에 신선한 충격과 존경을 보내는 하루를 맞이했다.

그 계절, 파리에서 그녀와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도 언제나 반가운 사이가 이어져 오고 있다. 2016년 봄이 온다고 하기에는 아직 찬 공기가 시샘하던 날,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 거리의 골목길이 아닌 통의동 한 카페에서 그녀와 재회했다. 진한 포옹을 하며 서로의 안부 묻기를 시작으로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 그녀는 파리의 소식과 도시의 변화 그리고 새롭게 시작된 일상 등에 대해서 이야기 했고 우리의 대화 주제는 꼬리의 꼬리를 물며 쉼 없이 계속되었다.

사람 모양의 동상 두개가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하고 있고 그 뒤에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편 성당을 바라보고 있으며 할아버지 한 명이 동상 옆을 지나간다

그녀는 내게 자신의 고민과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저는 행복 하고 싶어요. 나이가 들면서도 계속 꿈을 꾸는 게 행복이 아닌가 해요. 꿈을 꾸는 것이 현실이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게 인간의 본성이며 좌절을 하든 실패를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꿈을 꾸고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며 그리고 그로 인한 발전이죠. 결과와 상관없이 십 대와 이십 대만이 지닌 특권이 아닌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며 나이 들어가는 우리도 언제나 늘 꿈을 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 한국인의 행복감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매번 나오는 기사지만 때마다 이러한 기사가 눈길을 끄는 건 행복해지려는 마음, 누구나 품고 있는 그 마음 때문인 것 같다. 기사에서는 경제 수준은 높아졌지만, 그에 비해 행복감은 떨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자유로운 삶의 선택, 사회적 지지, 관대성 등이 한국인의 행복도가 낮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고 이는 세계 평균보다도 낮은 수준을 보인다고 했다. 

최근 우리 사회의 인문학에 대한 열풍은 행복감이 낮아지는 이 시대에 행복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힐링의 끈이 아닌가 생각했다. 점점 더 각박한 세상에서 타인의 힘으로부터 치유를 얻고자 하는 나약한 마음은 아닌가 생각하면 씁쓸함이 밀려온다. 서촌 입구에서 재단으로 오는 길에 ‘이상(시인)의 집’을 지나칠 때면 그녀가 내게 선사한 이상의 ‘오감도’가 떠오른다.

“제13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 이상의 ‘오감도’ 中-

숨 막힐 정도의 불안과 두려움 속에 끝을 모르고 질주하는 아해의 모습. 빠져나갈 수 없는 뫼비우스의 공간이자 막다른 공간에 다다른 것 같은 공포감과 숨막힘. 두려움의 일상 속에서, 혹은 삶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 일탈을 꿈꾸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여행 중에 그녀가 보았던 내 모습은 평온했고 따사로웠다고 한다.
새로운 변화를 겪는 그녀와 나,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에 대한 두려움을 알고 있기에 내게 오감도를 선사해준 게 아닐까? 그녀 또한 이 시를 읊조리며 권태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통의동을 넘어 삼청동으로 이어진 길을 걸으며 급격하게 변화하는 도시의 다른 모습,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조용한 골목이 잠식되어가고 건축의 연속성과 역사성이 사라지고 소비의 길로만 변하는 모습에 대해 함께 안타까워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란한 간판으로 시선을 빼앗은 길에 대한 탄식과 안타까운 마음이 교차했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역사성, 관계성, 정체성을 지닌 곳을 ‘장소’라고 했다. 영감을 느끼고 감성이 풍부해지는 곳 랭보의 시가 적힌 벽을 찾아 그 길을 걷는 것처럼 그것이 산책하는 곳으로 특별한 ‘장소’가 되고 공간과의 대화가 이뤄진다. 그러나 반대로 어디를 가나 똑같이 있는 획일적인 공간, 짧은 시간에 새로운 모습으로 수없이 되풀이되며 무관심과 단절감만을 느끼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제13의아해가 걷는 긴장과 불안함 그리고 두려움과 공포가 이어지는 ‘비장소’가 아닌가 생각한다.

푸른 하늘 밑 탑이 있고, 새들이 앉아 있는 넓은 공원 잔디밭 앞에 의자들이 줄지어 놓여있고 양쪽 의자에 각각 사람 한 명씩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일상에서 산책을 한다는 것은 장그르니에의 말처럼 자신만의 특별하고 고유한 장소가 만들어지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일상사 가운데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순수한 사랑 즉 우리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해주는 수단이 아닐까?

얼마 전 아웃컴에 관한 포럼에서 들은 말이 생각난다. 어항 안에 물고기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보이는 것이 투명성이고 그 솔직함과 투명한 과정이 아웃컴을 이끌어낸다. 지향했던 방향으로 잘 나아가고 있는지 이루고자 하는 ‘가치’에 중점을 두고 있는지 등을 지속적해서 생각하고 고민해 봐야한다는 점이다. 그럼 그 물고기는 얼마나 즐겁게 어항을 헤엄치고 있는지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겠느냐고 잠시 자문자답을 해본다.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하고 랭보의 시를 만나고 생쉴피스 성당을 지나 보부아르가 글을 쓰던 카페 레 되 마고에 앉아 진한 쇼콜라 쇼 한잔을 마신 후 들라쿠르아 미술관 옆 그녀가 좋아하는 퓌르스텐베르그 광장에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과 반사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 날의 산책은 마르크 오제가 말한 장소로써 ‘점적인 여행’이 아닌 ‘그 점을 연결 지은 거리와 거리로 이뤄진 도시를 온전히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내게 새로운 ‘장소’들을 발견하게 해주는 안내자였다. 덕분에 내겐 파리를 기억하는 나만의 특별한 ‘장소’들이 생겨났다.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메말랐던 감정의 순간들이 시작의 시간이 한참 떨어진 먼 곳에서 새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꿈이 있어요.”
추상적이지만 바라는 건 행복이라며 자신의 꿈을 말하던 그녀의 빛나는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다.

음악을 공유하고 일상을 전하고 꿈을 얘기하는 그녀와 나는 코드가 잘 맞았다. 나이가 들수록 꿈을 키워가고 항상 깨어있는 그녀는 중년의 나이이면서도 한참이나 어린 나에게 존중과 배려를 베푼다. 그런 그녀는 나눔의 기쁨과 열망을 채우려는 내게 지속적인 자극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고민과 꿈을 서슴없이 얘기하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며 곰곰이 생각해주는 그녀는 내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존재다.

햇빛이 비치는 공원에 잎이 무성하고 높은 가로수가 길게 늘어서 있다.

다음에 다시 그녀와 서울에서 재회하는 날이 오면,
나만의 특별한 ‘장소’에서 그녀를 맞이하며 그녀가 그려가는 새로운 꿈의 이야기를 이어서 듣고 싶다.
파리와 서울에 다리를 놓자고 하던 그 말처럼 다시 만날 만남의 순간을 기다리며…

특별한 장소에서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진 올해 초,
아름다운재단에서 만나 새로운 길을 함께 걸어갈 신입간사들에게 정현종의 시 ‘방문객’을 선사하고 싶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글: 정희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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