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는 지속가능한 사회발전을 위한 주요한 동력으로, 사회의 다양한 문제해결, 정부의 공공재 공급의 보충적 역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권리의 옹호, 공론장과 사회적 자본 창출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나 대부분 비영리기반의 시민사회단체 공익활동가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어 지속가능한 공익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이들의 소진을 예방하는 지원이 필요합니다.  공익활동가 쉼 지원사업은 활동과 삶의 조화를 위한 쉼 활동 지원을 통해 지속가능한 공익활동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지원사업입니다.

이 글은 2020 공익활동가쉼지원사업에 선정되어 활동한 참교육학부모회 윤정양님의 후기입니다.

선물 같은 휴식 

다리가 아니라 가슴이 떨릴 때 부지런히 여행을 다니라고 하지만 살다 보면 일상을 접어두고 훌쩍 떠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탓도 있으나 여행 다니는 게 한가한 사치로 보여 더 그러했다. 내게 ‘여행’은 집회나 연대, 시민사회단체 회의하러 다니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런 내가 참교육학부모회의 일원으로 아름다운재단이 마련한 활동가 ‘쉼’ 프로그램에 뽑히는 행운을 얻었다. 지난 8월 24일 5박 6일 일정으로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호사를 누려 본 적이 없으므로 선물 같은 ‘휴식’을 받아 가슴 설레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시간이었다. 일행들이 서울과 전북 정읍에 거주하고 나는 구미에 살고 있어서 각자 비행기를 타고 오전 10시 반경 제주공항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비행기를 타본 기억이 까마득한 터라 어린아이처럼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대구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긴 활주로를 천천히 지나가면서 좌회전하고 뉴턴 하는 것도 마냥 신기했다. 그러면서도 수시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공항 주변의 주민들은 그 소음을 어떻게 견뎌낼까 걱정이 되고 안타깝기도 했다.

사진 윤정양

탑승한 지 45분 만에 제주공항에 내렸을 땐 남의 나라에 온 듯 이국적인 제주도 풍광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도심을 벗어나자 눈에 들어오는 아담한 건물들과 키 작은 나무들, 군데군데 봉긋한 오름과 너른 들판, 높이 솟아있는 풍력발전기, 옥빛 바닷물, 공룡 똥과 새똥이 연상되는 현무암도 어찌 그리 정겨운지. 낮 12시 조금 지나 우리에게 숙소를 알아봐 준 분과 점심을 먹고 제주 서쪽 한림면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무화과나무와 고추, 호박, 부추 등의 채소들이 옹기종기 자라는 텃밭이 있는 깔끔한 집에서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저녁에 협재해수욕장으로 가서 제주 흙돼지로 저녁을 먹고 바닷가에 발을 담근 채 아름다운 비양도를 멀리서 바라보며 낙조를 감상하는 여유를 즐겼다. 50 평생 살면서 난생처음 온 제주도라 그런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노동운동을 하는 남편 일정이 바빠 신혼여행도 광주 망월동에 가서 열사를 참배하고 빨치산 활동거점인 지리산 피아골과 노고단을 다녀오는 것으로 대신했으니 제주도에 올 일은 없었다.

사진 윤정양


이튿날인 25일 아름다운 바닷물의 손짓에 이끌려 숙소에서 10분 거리인 금능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했다. 제주도는 저녁쯤 태풍 ‘바비’의 영향권에 접어들 거라는 뉴스 보도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점심 식사 후 4.3 평화기념박물관을 다녀왔다. 분단을 반대하고 이 땅의 진정한 독립을 열망한 순박한 제주 주민들이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4.3항쟁. 당시 30만 명이 안 된 제주 주민 중 무려 3만 명이나 미 제국주의와 그 하수인인 이승만이 보낸 친일경찰과 서북청년단에 의해 살해당한 야만의 현대사였다.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는 제주 총사령관 브라운 대령이 부임해오면서 한 멘트가 섬뜩하기까지 했다. 제주도민이 70년 이상 숨죽여 살아온 고통이 분단국가의 설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었고 평화와 자주통일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였다.

사진 윤정양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이미 태풍이 코앞에 다가온 것 마냥 이따금씩 비가 들이치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이틀 정도 제주도에 태풍이 머물 것으로 예상해서 넉넉하게 장을 봐와서 음식을 해 먹으며 태풍이 물러가길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숙소를 ‘서식지’라고 정겹게 불렀다. 태풍과 코로나19, 의사 파업에 대한 뉴스 속보를 보며 불안해하기도 했으나 독서도 하고 시국 토론도 벌이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다들 얼마나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왔는지 하는 일 없이 서식지에서 뒹굴어도 행복했다.

사진 윤정양


예상과는 달리 태풍이 26일 하루 만에 물러나서 여행 나흘째인 27일 해가 뜨자마자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하루를 쉬었기 때문에 더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한다는 급한 마음이 들었다. 언제 또 제주도에 올지 모르니 가능하면 구석구석을 섭렵하고 싶었다. 한림공원은 입장권이 12000원으로 무척 비싸서 들어가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곳 커피점에서 모닝커피와 제주 통밀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대장금 촬영지였다는 송악산으로 건너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둘레길을 걸었다. 송악산은 제주 서남쪽 마라해양도립공원 안에 있었고 맑은 날엔 마라도와 가파도가 선명하게 보여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하지만 태풍이 물러간 뒤 비가 오락가락하고 흐려서 기대했던 마라도, 가파도는 흐릿한 실루엣만 드러냈다. 한 시간 이상 둘레길을 걸은 터라 허기가 져서 예래고을이라는 소문난 맛집을 내비게이션에 의지하여 찾아가서 점심을 먹었다. 든든하게 속을 채운 후 천년을 간직해온 자연 숲인 비자림 자연휴양림을 찾았다. 제주 평대리에 위치한 천연기념물 제374호인 이 비자림 숲은 500~800년 된 비자나무가 2500여 그루나 자생하는, 단순림으로는 세계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나도풍란, 콩짜개난, 흑난초, 비자난 등 희귀 난초 식물이 지천으로 피어있었고 비자나무 외에 천선과나무, 자귀나무, 아왜나무, 머귀나무, 후박나무 등이 저마다 생명력을 뽐내며 발산하는 피톤치드와 테르팬을 마시며 황톳길을 거닐다 보면 태초의 제주도에 와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사진 윤정양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만장굴 표지판이 있어 예정에 없이 들렀는데 그 어마어마한 용암굴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학교 다닐 때 소풍 가서 보물찾기하다가 숨어있는 보물을 찾아낸 기쁨에 비할까? 아니 그보다 만 배는 더 컸다. 천연기념물 제98호인 만장굴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에서 가장 긴 용암동굴이라고 한다. 250만 년 전 제주도에 화산이 폭발했을 때 한라산 분화구에서 흘러넘친 용암이 바닷가 쪽으로 흘러내리면서 생긴 커다란 동굴이다. 원래 길이는 7km가 넘지만 1km 정도 개방돼있는 이 용암굴을 조심스레 걷다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하궁전 같은 웅장함과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천정엔 종유석이 매달려 있고 벽 곳곳엔 용암이 흐른 자국이 선연히 엿보이며 박쥐를 비롯해 땅지네, 농발거미, 굴꼬마거미, 가재벌레 등이 서식하는 보물 같은 생태 공간이었다.

5일째 되는 28일엔 전날의 여독이 풀리지 않았지만 씩씩하게 숙소를 나섰다. 맨 처음 찾아간 곳은 제주 남쪽에 있는 강정마을이었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마을을 지키며 투쟁해온 주민들을 볼 수 없었으나 해군기지를 건설하느라 여기저기 파괴된 마을의 모습이 아프게 눈에 들어왔다. 국방부는 대다수 주민의 반대를 묵살하고, 끈질기게 공사를 강행하여 농사짓던 땅이 군사기지로 변했고 감귤밭이 잡초밭으로 변한 지 오래됐다. 국내 유일의 바위 습지이자 생태계의 보고인 구럼비 바위엔 폭발물을 설치, 파괴해 버렸다. 그 결과 바위틈에서 살던 멸종위기의 붉은발말똥게와 맹꽁이도 찾아볼 수 없고, 연산호가 주단처럼 깔린 앞바다의 여름 돌고래도 볼 수 없었다. 제주도에서 유일한 은어 서식지도 사라졌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원앙새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새들이 서식하고, 집단으로 자생하는 천연기념물 녹나무, 멸종위기종인 솔잎란도 다량발견된 생태 평화마을, 강정이었다. 우리나라 곳곳에 해군기지가 있어 제주 해군기지가 필요하지 않고 강정마을은 지형적으로 기지건설이 불가능한데도 건설을 고집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 해군기지인지 따져 묻고 싶었고 둘러보는 내내 가슴이 아려왔다.

사진 윤정양

무거운 마음으로 다음 예정지인 쇠소깍으로 향했다. 서귀포시 하효동에 있는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78호로, 쇠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쇠둔’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효돈천을 흐르는 담수와 해수가 만나 깊은 웅덩이를 만들어 쇠소깍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되었다. 소를 의미하는 ‘쇠’와 웅덩이를 일컫는 ‘소’, 끝을 나타내는 ‘깍’이 합쳐진 지명이다. 쇠소는 실제로 용암이 흘러 내리면서 굳어져 형성된 계곡 같은 골짜기로 서귀포 칠십리에 숨은 비경 중의 하나라는 명성에 맞게 아름다운 기암괴석과 소나무, 옥빛 물이 어우러져 감탄사가 터져 나오게 했다. 쇠소깍에서 조금 떨어진 바다 한복판에 20m 높이로 홀로 우뚝 솟아오른 기암절벽인 외돌개도 독특한 인상을 주었다. 명승 제79호인 이 바위는 150만 년 전 화산폭발로 생겼으며 장군봉, 할망바위라고 불리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날 가장 큰 탄성을 자아내게 한 것은 중문관광단지에 있는 주상절리였다. 서귀포시 해안을 따라 발달한 이 주상절리도 화산폭발로 생긴 지형으로 높이 30~40m, 폭 1km로 국내 최대규모라고 소개하고 있다. 마그마가 냉각되고 응고하면서 부피가 수축하여 다각형 기둥 모양의 주상암체가 되었다. 초능력을 가진 누군가가 깎아낸 조각 작품처럼 웅장하게 서 있는 그 신비로운 자태를 글로 담아내기엔 내 표현력이 부족하다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마지막 날인 29일엔 의미 있는 추억을 남기고 싶어 특별한 분을 만나러 갔다. 참교육학부모회 회원으로 인연을 이어가다가 서울에서 어렵게 운영하던 인문사회과학책방 ‘풀무질’을 접고 이곳 제주도 성산포 부근으로 거처를 옮긴 은종복님이다. 여기서도 서점을 운영하고 계신다. 차도 판매하고 있는 ‘제주 풀무질’ 책방은 어찌나 아담하고 분위기가 좋은지 오래도록 책에 파묻혀 있고 싶었다. 은종복님은 도서정가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2014년부터 부분 도서정가제, 이를테면 책을 사면 10% 할인해주는 제도를 한시적으로 허용하고 있었다. 올해 11월에 재개정을 앞두고 있는데 아예 도서정가제를 폐지하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이 있어 대통령에게 도서정가제를 건의하는 편지를 보낼 예정이라고 하며 우리에게 그 편지를 읽어주었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OECD 국가 중 도서정가제를 하지 않는 나라는 미국, 영국, 호주, 중국, 한국뿐이라고 한다. 그래도 미국은 동네 책방을 보호하려고 40% 넘게 책방 운영자에게 이익을 주고 영국도 동네 책방을 보호하는 정책을 펴서 어딜 가나 동네 책방이 있다고 한다.

“동네 책방이 사라진 나라는 망한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의 노력이 있어서인지 최근 몇 년간 제주 바닷가에만 60개 넘는 책방이 생겨 독서토론회 등 여러 문화활동으로, 멋진 제주공동체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감동하여 제주 해녀 이야기 등 제주에 관한 책을 몇 권 구매한 후 후일을 기약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18대 대선에서 낙선한 문재인 대통령이 제주도에 머물고 있을 때 자주 이용했다는 식당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서 점심을 먹었다. 제주도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라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밀려왔고 제주도를 벗어나는 순간 제주도가 그리우리라는 생각에 울컥거렸다.

사진 윤정양

제주공항으로 가는 길에 안타까운 광경을 목격했다. 제2공항 건설을 위한 도로확충과 기반시설을 만들기 위해 비자림 가로수길을 뭉텅뭉텅 베어낸 모습을 보고 강정마을에서 느꼈던 슬픔과 분노가 올라왔다. 제주 섬은 지금 제2공항뿐만 아니라 골프장과 리조트, 카페와 펜션을 짓느라 끝도 없이 파헤쳐지고 있다. 이렇듯 눈앞의 돈벌이와 ‘성장환상’에 사로잡혀있는 정부와 제주특별자치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계에서 유일한 유네스코 3관왕(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인 천혜의 보물 제주도를 귀하게 여기고 더 이상의 파괴가 없도록 대책을 세우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라고 본다. 제2공항 건설과 해군기지 건설을 중단하고 지금 그대로의 제주 섬을 보존하는 노력을 해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5박 6일간의 짧지 않은 여정으로 많은 걸 깨달았다. 틀에 짜인 여행보다는 편히 쉬고,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다니자는 컨셉으로 출발했고 아름다운 재단의 지원 덕분에 함께 한 활동가들이 우정을 다지는 행복한 자리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난개발로 자연환경과 주민의 삶을 파괴하는 제주 섬의 아픔과 신음을 가까이에서 대하면서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제주 섬의 자연과 평화, 주민의 인간다운 삶이라는 주제가 우리 모두의 고민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글 : 참교육학부모회 윤정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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