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 ‘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은 공익활동을 하고자 하는 시민모임, 풀뿌리단체, 시민사회단체를 지원합니다. 특히 성패를 넘어 시범적이고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지원함으로써 공익활동의 다양성 확대를 꾀합니다.  ‘2021 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 너머에는 어떤 분들이 일하고 계실까요?
‘다른몸들’은 2021 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으로 ‘질병권 보장을 위한 담론 만들기!’ 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업 너머의 사람. 조한진희 활동가를 만나보았습니다.

․ 아프다→병원간다→낫는다→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 아프다→병원간다→여전히 아프다→??

제가 아픈 건 2009년부터였고 어느 정도 회복이 된 게 2015년 정도였어요. 아프고 나니까 알겠더라고요. 어떻게 아파야 하는지에 대해서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요. 연애, 결혼, 출산, 육아 같은 살면서 겪는 큰일들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창구를 찾는 게 어렵지 않잖아요. 예비부부교실이나 예비부모교실과 같은 강의도 있고 책도, 영상도 접하기가 쉬워요. 그런데 질병과 관련해서는 병원에 간다는 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 거예요.

건강이 회복되면 가장 좋겠지만 회복되지 않고 계속 질병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아파서 좌절된 꿈과 계획들을 어떻게 다시 복구한다던가, 아픔을 삶의 밑천으로 바꾼다던가. 누군가가 말해 준 적도, 배울 수 있는 공간도 없는데 나는 그런 상태로 살아야 하고.

질병권의 시작 : 우연과 필연 그리고 꽂히는 것

그 때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에서 다큐멘터리 제작과 관련한 강의를 요청받았어요. 나는 이제 그런 주제의 강의보다, 질병과 관련해서 잘 아플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잘 아프기 위해서 필요한 몇 가지 것들>이라는 제목의 워크숍을 열고 싶다고 얘기했어요.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다시 연락이 와서는, 워크숍을 하게 해 줄테니 다큐멘터리 강의도 해 달라고. 그렇게 딜을 하고 워크숍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잘 아프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라니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호할 것 같더라고요.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낯선 화두였으니까요. 그래서 워크숍 이전에 4회기 정도 일다에 글을 연재했어요.

질병권(잘아플 권리) 이야기를 처음 주변에 했을 때도 약간, 흥미로운 헛소리 정도로 받아들여져서(웃음), 처음 시작할 때는 이렇게 콘텐츠가 넘치는 세상에서 아프다고 얘기하는 걸 누가 보겠나, 관심 있는 소수를 위해 해야지 이런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뜻밖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반응을 한 거예요. 연재하는 동안, ‘내가 아프면서 어떤 혼란을 겪었는데 답을 구할 수 없어서 막막했다’, ‘누구나 아픈데 아픈 상태의 이야기는 없고, 질병을 극복했다거나 그 과정에 가족과 신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들만 있더라’, ‘아픈 상태로 어떻게 이 세상과 협상하며 살 수있을까’ 같은 피드백들을 많이 받았어요. 이제껏 내 일기장에만 쓰던 생각들이 공론화할 만한 이야기였구나, 사회적인 의제로 얘기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프던 6-7년의 기간동안 사람들도 거의 만나지 않고 TV도 모두 끊고 지냈어요. 그러다가 회복되면서 조금씩 사회에 발을 들이려는데 약간 이런 마음이 드는거에요.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도 썼지만 나에게는 없는 체력을 갖고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동료들이 부럽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질투심이 생기기도 하고. 제가 좀 성취지향적인 근대적인 인간이라, 뭔가 사회에 내 자리가 없는 것 같아서 자괴감도 들고 그랬어요. 사회적인 성공을 위해서 사회운동을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내는 발언이 쌓여가면서 그게 또 다음 활동에 힘을 실어주는 기반이 되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쉬기도 했거니와 이전에 활동했던 이슈와는 다른 질병권이라는 주제로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대중의 반응이, 질병권 운동의 필요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도 힘을 많이 받았어요. 정말 즐거운 과정이었어요. 요즘 제 인생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해요. 약간 우연과 필연과 꽂히는 것이 엉켜져서 살아온 삶이구나, 라고.

‘반드시 질병권 운동을 해야지‘ 하고 시작했다기보다, 아프면서 느꼈던 좌절이나 절망감들을 나 이후에 아픈 누군가는 덜 겪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어요. 작고 작은 성취들을 이루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서 지금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더 많은 아픈 이야기가 필요하다

첫 시작은 아픈 몸들의 삶을 우리 사회에 가시화시켜야겠다는 거였어요. 아픈 사람들은 굉장히 많은데 아프지 않은 척하거나 아프다고 말하는 걸 주저해요. 이를테면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20대 친구들의 경우 SNS에 아프다는 얘기를 절대 안 쓴다더라고요. 혹시라도 취업에 불이익이 있을까 봐. 예전에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 ‘어떻게 행동했길래’의 시선이 있었던 것처럼, 질병을 갖게 된 것에 대해서도 ‘건강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의 시선이 있거든요.

아픈 것을 그저 개인적인 일로 여기지 않고, 내가 아픈 것과 그로 인한 어려움이 사회 구조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의 이야기를 담는 걸 저는 ‘저항적 질병서사’라고 해요. 자신의 질병을 사회적으로 연결해서 해석하는 연습을 하고, 그렇게 쓴 글을 연재하기도, 연극을 통해서 알려내기도 하면서 우리 사회에 아픈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 지 가시화 시키는 작업을 했어요. 이전에 아름다운재단을 통해서 지원받았던 ‘질병과 함께 춤을’ 이라는 글쓰기 소모임도,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연극 작업도 그 일환이었고요.

2-3년 정도 작업을 하다보니 곳곳에서 유사한 작업들이 시작되기도 하고, 어느 시점에는 질병 경험을 기록한 책도 많이 출간되더라고요. 조금씩 질병권 담론이 우리 사회에 하나의 흐름으로 형성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잘 아프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것들, 중요한 건 관점

가시화 이후의 스텝으로, 잘 아플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실제 어떤 것이 필요한지 구체적인 논의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돌봄, 노동, 젠더, 의료와 같은 키워드로 분류하고 키워드 별로 논의를 키워가려고 했는데, 때마침 팬데믹 상황이 되면서 돌봄 담론이 엄청 이슈화 되었어요. 개인적으로는 ‘돌봄’이라는 게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무게 있게 언급되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이 분위기가 사그라들지 않고 오래 갔으면 좋겠어요. 한편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관심이 있는 만큼 편중되지 않은 시각으로, 정말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의 관점과 인권이 누락되지 않고 제대로 반영된 담론을 만드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작년에 이어 올해는 돌봄 담론을 본격적으로 확장시켜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일 이전에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해서, 일과 관련되지 않은 키워드로 소개를 부탁했는데, 정말로 아주아주 긴 정적 끝에 ‘농사를 좋아하지만 일하느라 텃밭을 방치하고 있는 조한진희입니다’라는 소개를 들었다.

그는 자주 하는 일이 전부인 사람이 된다.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본래도 일을 좋아하는 타입의 사람인데, 오랜만에 다시 시작한 사회생활이 너무 재미있고 좋아서 그렇단다. 그래도 최근 어떤 계기로 스스로의 감정과 상태를 살피지 못해온 것을 새삼 깨닫고, 일만큼 스스로를 잘 지키면서 사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기로 했다.

건강할 때는 낯설지 않았던 세계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새로운 세계가 되었다. 그가 ‘다른몸들’과 일궈가는 시도들과 쌓아가는 작은 성취들로, 다음의 다른 몸들에게는 이 세계가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곳이기를. 그저 일상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더불어 그래서 모쪼록 방치된 텃밭이 회복되기를, 그의 정의가 지켜지기를!).

질병권이 보장되고, n개의 다른몸들이 존중 되는 세상을 지향합니다. 질병, 젠더, 장애, 민족, 계급, 종차별 등의 문제를 교차적으로 고민하며 느리게 변혁을 만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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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박혜윤
전(前) 변화의시나리오 담당자 / 귀 기울여 듣고 애정을 담아 질문하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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