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동안 불가능을 넘어서다!

재활치료 지원이 꼭 필요한 이유 _ 이시영 이른둥이 이야기

웃고 있는 이시영이른둥이와 어머님

웃고 있는 이시영이른둥이와 어머님

 

고비마다 기적이 움트다!

“그렇지, 시영아 이번엔 주황색을 잡아 볼까?”

시영이는 치료사의 목소리를 따라 주황색 비치볼을 힘껏 끌어안는다. 그리고 “주황색”이라고 발음한다. “눈을 제대로 안 보는 것 같은데 똑바로 봐야지. 시영아, 노란색은 어디 있어? 그래그래, 잘했다! 자, 이제 다리 쭉 펴고 받는 거야 알았지? 그렇지, 한 번만 더 해볼까….”

몇 번을 주고받은 뒤 공 대신 풍선을 쥔 치료사는 시영이에게 풍선을 튕겨보라고 주문한다. 양손을 함께 사용해서 위로 쳐 올리고 그것을 다시 잡는다. 비치볼과 풍선 사이를 오가던 시영이의 이마에 어느 새 땀방울이 송글 맺혀있다. 또래의 아이들에겐 가볍고 흔한 유희인데 시영이에겐 여전히 버거운 재활치료 과정이다. 지켜보는 엄마 윤경미 씨의 코끝이 매워진 이유다.

첫째 아이를 무사히 출산했기에 별 걱정이 없었던 이용구&윤경미 부부. 그들은 이른둥이를 상상하지도 못했다. 정기적으로 다니는 산부인과는 물론이고 근처 어디에도 인큐베이터를 비치한 병원이 없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담당의사의 당부도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한순간 급변했다. 산모와 아기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 닥치고 나서야 큰 병원을 찾았지만 옮길 시간이 없었다. 결국 수술이 가능한 병원에서 출산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선이 최선이었다.

“25주 4일째 되는 날 태어난 시영이는 고작 800g이었어요. 내로라하는 병원으로 옮긴 첫날 들었던 말은 ‘오늘 하루가 고비다’였고요. 하지만 힘드니까 포기하라는 전문가의 한계를 시영이는 매번 넘어섰어요. 2010년 봄에 태어났으니 벌써 여섯 번째의 봄을 맞이했죠. 6년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저는 기적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시영이른둥이와 병원 재활치료사가 재활치료를 진행중입니다.
이시영 이른둥이와 병원 재활치료사가 재활치료를 진행중입니다.

 

재활치료, 어째서 비보험인가요?

2개월은 인큐베이터에 있었고 나머지 2개월은 뚜껑을 벗긴 바구니가 시영이의 안식처였다. 말이 안식처이지 수술과 시술이 반복되는 그곳은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말 그대로 시영이는 사투를 벌였다. 황달이 심해서 태어난 지 2주일 만에 동맥관개존증(patent ductus arteriosus, PDA)을, 이후엔 뇌에 물이 차는 수두증(水頭症) 수술을 했다. 체력 때문에 수술이 어려웠을 땐 등과 머리에 주사기를 꼽아 물을 빼냈다. 머리가 2배로 부풀어 오른 시영이는 울지도 않고 눈만 껌뻑였다. 마침내 몸무게 3kg이 되는 날 응급으로 뇌를 열어서 기계(Shunt)를 삽입했고 그제야 주사기가 아닌 소변으로 물을 빼낼 수 있게 됐다. 무엇을 해도 시영이에겐 가혹했다. 그래도 멈출 수 없는 삶이었고, 윤경미 씨가 엄마로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뿐이었다.

“고군분투했지만 장애를 피해가긴 어려웠어요. 한 달이 지나자 시영이가 뇌출혈 4기이고 백질연화증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중증장애를 가지게 될 테니 큰 각오를 하셔야 될 거라는 의사 말에 멍해지더라고요. 현재 시영인 뇌병변장애2급인데 출산 직후 혼자 호흡도 못하는 아이를 장시간 방치해 놨고 후송되는 동안 적절한 응급조치를 못했던 열악한 상황이 문제였을 거예요. 전문가를 믿고 따랐는데 정말 화가 나요. 사실 제 화는 별 거 아니죠. 그 때문에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 재활치료를 받아야 하는 시영이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가슴이 아파요.”

만 5년여 동안 세 개의 병원을 돌며 각종 재활치료를 진행했다. 평생 누워 지낼 거라던 시영이는 물리치료를 받고 뒤집기를 선보였을 뿐더러 네발기기와 걷기까지 가능해 졌다. 언어치료를 통해 소통의 기운을 보였고, 감각통합치료 후엔 희망사항이었던 눈 맞춤과 정서교감이 이뤄졌다. 윤경미 씨는 시영이 앞에 놓인 절망적 예측이 ‘가능성’이란 걸 깨달았다. 그걸 시영이가 몸소 보여줬다. 문제는 돈이었다. 제때 치료를 제공하려면 자원이 필요했다. 지금도 한 달에 100만 원을 재활 치료비로 지출하는데 앞으로는 더 많은 지원이 요구될 터였다.

“없는 것보단 낫지만 바우처는 정말 생색일 뿐이에요. 현 시세와 다른 금액 책정으로 본인 부담금이 그야말로 부담이 되거든요. 그나마 저렴한 복지관은 대기자가 엄청나고요. 시영이도 4년 기다려서 2년 치료 받았어요. 무엇보다 이건 과외가 아니잖아요. 시영이는 장애등급을 받은 아이인데 인지치료, 음악치료 같은 건 왜 보험이 안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학습이 아니라 ‘치료’인데 어째서 개인이 전부 부담해야 되나요. 치료 받으면 좋아질 수 있는 아이들이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으니까 점점 뒤처질 수밖에요.” 

 

솔방울을 손에 쥐고 있는 이시영어머님의 모습입니다.
솔방울을 손에 쥐고 있는 이시영 어머님의 모습입니다.

 

장애를 바라보는 건강한 시선

이용구&윤경미 부부의 꿈은 소박했다. 맞벌이 하면서 두 살 터울의 남매를 무탈하게 키우는 것.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남편 이용구 씨가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고 월급이 연체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뇨 판정까지 받았다. 겨우 취직을 했지만 영업실적에 따라 소득이 정해지는 통신서비스기사로 지내기란 쉽지 않았다. 윤경미 씨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좌절을 거뒀다. 한 사람이라도 기운을 차려야 돌파구가 생길 거라 믿고 유일한 희망인 네일아트 숍을 부지런히 꾸렸다. 결과는 참담했다. 가게를 접고 다른 가게의 네일 아티스트로 취직했다. 나쁘지 않던 이용구&윤경미 부부의 수입은 터무니없이 줄었고 지출은 배로 늘었다. 척박한 일상에 부딪칠수록 다른 누구보다 시영이에게 미안했다.

“시영이의 변화를 보면 하루도 재활치료를 멈출 수 없어요. 한데 우리 부부의 경제 상황이 그걸 뒷받침해주지 못 해서 안타까워요. 근시안적인 복지서비스도 억울하고요. 이른둥이로 태어나 장애를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구나 싶어 속상해요. 그래서 아름다운재단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의 지원이 더 고맙고요.”

이른둥이 엄마들이 만든 온라인 카페에서 ‘이른둥이 재활치료비 지원’을 알게 됐다. 그리고 2012년 1월과 2014년 7월에 각각 150만 원씩 2번의 지원을 받았다. 처음엔 ‘과연 될까’ 싶었는데 그들은 흔쾌히 시영이를 도왔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십시일반 한 지원금. 그것은 시영이와 이용구&윤경미 부부를 다독였다. 책임회피하려는 전문가들에게 치이고 장애를 바라보는 편견에 상처 받으며 냉혹한 현실을 살얼음처럼 걷던 그들에겐 따뜻한 위로였다.

“시영이에게 초등학교 1학년인 오빠가 있어요. 시영이 때문에 혼자 크는, 생각하면 마음 아픈 아들, 시우예요. 그 아이는 동네 친구들이 네 동생은 왜 아직 못 걷냐, 왜 그렇게 작냐 물으면 ‘내 동생은 장애인이야. 여섯 살인데 아직 못 걸어. 하지만 이제 곧 걷게 될 거야’ 대답해요.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쓰느라 저조차도 얼버무리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시우를 보면서 매번 배워요. 장애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요.”

이용구&윤경미 부부는 장애를 상실과 좌절이 아닌 ‘다름’의 차원에서 이해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다름이 상실과 좌절로 이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사회. 그것이야 말로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가 재활치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근거다.

 

글 우승연 | 사진 이동훈

 


서지희간사  변화사업국 특별사업팀│서지희 간사 희망이란 볼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노신의 <고향> 중- blog_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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