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을 선택하기 전에는 다시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게 참 힘들었어요. 학교 다니는 동안에는 일을 못하는데 그러면 생활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답답했죠. 그러다가 지금의 전공을 선택한 건데… 제가 어쩌다가 이렇게 비용이 많이 드는 길을 선택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생각도 못할 거 같아요.”
주얼리디자인 전공을 선택하던 4년 전의 이현주(가명) 씨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몰라서 용감했다. 그저 직접 예쁜 주얼리들을 만드는 게 좋았을 뿐 디자인 공부에 이렇게 돈이 많이 드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경제적 문제 때문에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고른 것이 역설적으로 유독 돈이 많이 들어가는 디자인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현주 씨는 웃고 있었다. 그 때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그의 대학 생활은 힘들었지만 그만큼 즐거웠다. 그 시절은 이제 거의 끝나간다. 그는 지금 졸업을 앞두고 동기들과 함께 졸업 작품 전시회를 하고 있다.
부모님 없이 사회의 돌봄을 받다가 자립한 현주 씨가 이렇게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디자이너로 자라나는 과정에는 아름다운재단의 <대학생 교육비 지원사업>이 있었다.
그가 만든 작품이 모두 없어진 이유
현주 씨는 원래 건축을 배우다가 전공이 잘 맞지 않아 휴학을 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에 여유가 생겨 액세서리를 사게 됐다. 곧 직접 재료들을 조립해 물건을 만들게 됐다 그리고 한번 시작해 보니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그는 지금의 주얼리디자인 전공을 만났고 대학에 다시 입학했다.
새로 찾은 길은 현주 씨에게 참 잘 맞았다. 안 그래도 그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뛰어난 ‘금손’이었다. 뭐든 잘 만들었지만 특히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물건을 만들고 싶었다. 주얼리는 딱 그런 물건이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전공자들이 쓰는 미술용품은 현주 씨가 그동안 쓰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가격대의 물건이었다. 그는 “물감이나 색연필, 붓 같은 물건조차도 너무 비쌌다. 몇천 원 정도면 될 줄 알았던 삼각자 하나에 만원이 넘어갔다”고 회상했다.
“처음 준비물을 사러갔을 때부터 엄청 당황했어요. 한두 번은 친구들 물건을 빌려 썼는데, 다 소모품인데다가 워낙 비싸잖아요. 소모품이 아니라도 계속 사용하면 내구성이 떨어지고요. 동기들을 보니까 다들 자기 물건을 사서 쓰더라구요.”
자주 빌려 쓴다고 누가 뭐라고 한 적은 없지만 현주 씨는 괜히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최대한 용돈을 아끼고 그 돈으로 재료를 샀다. 그래도 아주 전문적인 공구는 사지 못했다. 그래서 주로 학교에 있는 기본 공구들로 작업을 했다. 특히 마음 아픈 기억은 기껏 만든 작품의 재료를 재활용했던 것이다. 작품은 성장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실물이 남아있지 않다.
“많이 만들어야 실력이 늘잖아요. 그런데 매번 재료를 사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드는 거예요. 주로 은을 사용하는데 작품을 녹여서 다시 만들고 또 녹이고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만든 작품들은 사진으로만 있어요. 차마 못 버리는 거 몇 개만 남겨놓았죠. 너무 아까워서… 언젠가는 그 작품들을 다시 만들고 싶어요.”
“친구들이 자꾸 물어봐요. 어떻게 작업해야 하냐고”
그러던 현주 씨에게 아름다운재단 대학생 교육비 지원사업은 새로운 기회였다. 그는 “사실 붙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면접까지 보고 나서도 자신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선물처럼 교육비 지원은 그에게 찾아왔다.
그 뒤로 현주 씨는 오랫동안 포기하고 살았던 것들,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꿈꾸게 되었다. 더 많이 누리게 되었다. 학원에 다니고 원서를 샀다. 작업 때문에 안 좋아진 허리를 교정하기 위해 운동도 배웠다.
“학교에서 못 배운 방법이나 재료들을 학원에서 새로 배웠어요. 기초적인 작업을 자세부터 다시 잡게 됐죠. 망치질이나 땜질 같은 거요. 그리고 디자인 관련된 책들은 대부분 외국 서적이라서 엄청 비싸거든요. 어떤 책은 한 권에 10만원이나 해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어 공부도 해야 하고요. 교육비로 책도 사고 영어 공부도 했어요”
현주 씨는 참 욕심이 많은 디자이너였다. 새로운 기술을 익힐수록 모르는 게 더 많이 나온다고 했다. 할수록 하고 싶은 게 많아지고 배울수록 배우고 싶은 게 많아졌다. 새로운 것을 익히고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그에게는 기쁨이었다.
동기 중에 학원에 다니는 학생은 그를 포함해서 단 둘이었다. 그의 디자인 실력은 이미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는 상황이 아니었다. 친구들은 그에게 자꾸만 물어봤다. 이럴 때는 어떻게 작업해야 하냐고. 재료는 무엇을 쓰면 좋겠냐고.
뿐만 아니다. 마음도 함께 달라졌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그 전까지는 돈 걱정 때문에 일부러 약속을 피하곤 했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까 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가능해졌다. 게다가 대학생 교육비 지원사업을 통해서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비슷한 삶을 살았기에 더 편안한 친구들이었다.
“여기 장학금은 서로 만날 자리가 많다는 게 달라요. 제가 원래 낯선 사람은 경계하거든요. 과 동기에게도 속사정 얘기는 안 해요. 여기서 만난 친구들하고는 통하는 게 있으니까 좋아요. 참 따뜻하고요. 어떤 친구는 주얼리 공모전만 보면 먼저 저한테 알려주더라고요.”
“작업하는 내내 두근두근”… 천생 디자이너의 마음
현주 씨는 이번 졸업전시회에 ‘흑조’, ‘clam(조개)’, ‘the black box’라는 세 가지 작품을 내놓았다. 그는 다소 상징적인 작품을 좋아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흑조’는 백조가 아닌 ‘흑조’로 자신을 깨고 나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작은 파편 조각들이 흩날리듯 붙어있는 것이 그가 생각한 ‘흑조’의 이미지다. 작품을 설명하는 그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아무래도 가장 즐거운 때는 작품이 완성됐을 때지만, 작업을 할 때도 내내 두근두근해요. 머릿속으로 떠올린 게 실제 이미지로 만들어져서 작품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정말 좋아요. 하고 싶은 작품이 생기면 잠들기 전에 자꾸만 생각이 나요. 빨리 해야지 싶어서요.”
그래서 현주 씨는 졸업식이 열리는 내년 2월 전까지 최대한 많이 학교 작업실을 사용하려 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작품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4년 내내 공부했으면 조금은 지겨울 만도 한데, 아직도 더 작품을 만들고 싶어서 시간이 아까운 모양이다. 친구들은 모두 여행을 간다는데, 그는 달콤한 휴식보다 작업이 더 고프다.
이렇게 천생 디자이너인 현주 씨지만 졸업을 하고 난 직후의 길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 아직 배우고 싶은 게 많아서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기도 하고, 한번쯤은 다른 길에서 다른 경험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당장 어떤 길로 가든 그는 결국 자신이 평생 주얼리디자인을 할 거라고 확신했다. 공방도 내고 작업실도 갖고 브랜드도 만들 것이다.
아마도 이 확신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디자인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의 눈은 마치 자신이 만든 작품처럼 반짝반짝했다. 그렇게 주얼리처럼 빛나는 현주 씨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힘든 환경 속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려는 후배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남겼다.
“디자인이라는 전공이 돈이 많이 들기는 하죠. 그래도 하고 싶은 대로 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학교 홈페이지 같은 데서 찾아보면 좋은 기회나 정보들도 많이 얻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혹시 당장 지금 디자인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요. 바로 대학에 가서 디자인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정말 좋아하면 기회는 다시 있을 테니까요.”
글 박효원ㅣ사진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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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가
우와. 흑조 작품이 굉장히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