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금 1세대의 기록 ① 알고리즘 이전의 모금가들

1%나눔팀 고혜진 팀장

2026.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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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금 1세대의 기록 ① 알고리즘 이전의 모금가들

지금 아름다운재단은 기부자님들과의 여정을 다시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재단에는 0년차 새내기 기부자님부터 창립부터 26년을 함께 해온 분들까지, 그결이 무척 다양한 기부자님들이 함께 해주고 계신다. 자립준비청년 지원 ‘열여덟 어른’ 캠페인으로 처음 만난 분, 재단이 막 생겨났을때부터 함께하신 분, 특정 사업에 마음이 닿아 오신 분들까지. 들어온 문도, 머무는 방식도 각기 다르다. 우리는 어린이, 노인, 환경등 어떠한 특정 분야만을 고민하는 기관이 아니기에 다양한 사회문제를 함께 바라봐줄 동반자로서 기부자님들과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분들과의 접점을 고민하다 보니, 오래된 기억들이 올라왔다. 2000년대 후반, 아름다운재단에 몸담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다. 모금 현장은 어디나 크게 다르지 않았고, 기부자님들의 마음도 그러했다. 그 시절 오갔던 마음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지… 기부라는 행위 안에는 시대가 바꾸지 못하는 정서가 있다고 믿는다. 한국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품어온 정, 이웃에 대한 마음, 그게 기부라는 시스템으로 이어져온 과정 속에, 데이터로는 잡히지 않지만 수많은 노력이 존재했다. 그 안에 나의 시간도 있다.

지로용지 한 장의 무게

당시에는 기부금 납부가 지로용지로도 이루어졌다. 기부자님들께 매달 지로용지를 보내드리는 일도 내 몫이었다. 좁은 인쇄실, 나보다 덩치가 큰 지로용지 묶음. 한 달에 한번, 혼자 서서 그 묶음들을 기계에 밀어 넣었다. 종이가 조금이라도 비뚤게 들어가면 인쇄가 어긋났다. 찌지직 찌지직. 요란한 소음과 함께 종이 한 묶음이 쓸모없어지곤 했다. 나중에는 그냥 몸이 기억 했다. 각도, 압력, 속도. 그렇게 인쇄된 지로용지는 얇은 소식지와 함께 전국으로 발송됐다.

대부분의 어르신들께서 그 용지를 들고 직접 은행 창구를 찾아가셨다. 창구 직원에게 건내고, 현금을 내고 영수증을 받아 고이 보관하셨다. 그 번거로운 과정을 매달 스스로 챙기는 분들이 많았다. 그 중 한 분이 기억난다. 매달 300원을 지로용지로 착실히 기부하시는 할머니였다. 한 달도 거르지 않으셨다. 우편이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는 달이면, 먼저 전화를 주셨다. 지로 수수료가 300원 남짓이던 시절이니, 실제로 남는 돈은 없었다. 우편비까지 생각해보면 오히려 적자였다. 나는 지로용지를 접어 봉투에 넣으며 생각했다. 이 정성은 금액으로 읽히는게 아니라고. 기부자의 마음을 숫자로만 환산하려 하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다.

영수증, 통장, 그리고 연필

전자기부금영수증이 없던 시절이라 기부금영수증을 모두 직접 인쇄해서 우편으로 발송해야 했다. 많은 양을 인쇄하다 보니 프린터기에 종이가 걸리기 일쑤였다. 겨우 다 뽑아내면 한장 한장 직인을 찍었다. 우편 라벨을 봉투에 붙이고, 영수증 속 주소와 라벨이 맞는지 하나하나 확인하며 접어 넣었다. 그 정성을 기울일 수 있었던 건, 기부자님의 존재를 손끝으로 직접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용카드가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던 시절이라, 자동이체나 무통장입금으로 기부하는 분들이 훨씬 많았다. 무통장 입금내역을 확인하려면 매월 1일, 시중 은행이 모두 모여있는 시청으로 외근을 나가 통장 정리를 해왔다. 돌아오면 출력된 내역을 시스템에 하나하나 입력했다. 연필로 줄을 그어가며, 오천원, 만원에 담긴 정성을 꾹꾹 눌러 담는 작업이었다.

자동이체 신청도 지금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금융결제원 사이트에 신청 파일을 매번 수동으로 업로드해야 했다. 신청 날짜를 놓치는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었다. 불편했지만, 그 불편함이 기부자 한 명 한 명을 흐릿하게 두지 않았다. 연필로 줄을 긋는 동안, 그 분들의 이름이 눈에 새겨졌다.

저금통과 보자기

그 시절에는 저금통이 참 많이 배포되었다. 성인 남성 주먹만 한 크기. 어린이집, 유치원, 기관, 개인 기부자들까지 많게는 몇 천개도 박스에 담아 포장했다. 산에도 올라갔다. 저금통을 등에 짊어지고 산꼭대기를 올라 배포했다. 거칠고 무모했지만, 그게 현장 모금이었다.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그렇게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모금을 배웠다.

그렇게 나누어진 저금통들은 살뜰히도 돌아왔다. 우편으로 보내시는 분들도 많았고, 배송 중에 분실될까봐 직접 사무실로 찾아오시는 분들도 많이 계셨다. 저금통을 신주단지 모시듯 보자기에 곱게 싸서, 조심스레 건네던 그 손길은 잊히지 않는다.

꽉 찬 저금통에는 보통 3만원에서 5만 원이 들어있었다. 운이 좋은 날은 동전들 사이에 꼬마 친구들이 쓴 편지도 볼 수 있었다. 저금통을 열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무실에는 동전을 헤아리는 기계가 있었고 동전 보따리를 들고 은행에 가면 창구 직원이 당황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저금통 하나에 3만원이 들어있다는 건, 누군가가 매일 조금씩 넣었다는 거다. 그 동전들이 모이는 시간 동안, 기부는 그 사람의 일상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2008 꿈을 담은 모금함 ‘무지개상자’ 캠페인 당시 재단에 도착해온 저금통들

전화기 너머의 기부자들

사무실 전화량도 많았다. 기부를 신청하거나 변경하거나 궁금한 것들을 물어오시거나, 그냥 안부처럼 전화를 주는 분들도 계셨다. 늘 격려해주고 응원해주셨다. 더 많이 주지 못해 미안해하던 분들도 예나 지금이나 계신다. 미안할 것이 없는 일인데… 그 말들이 마음에 오래 새겨져 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기부자들과 전화기 너머로 쌓아가던 시간들. 돌이켜보면 모금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것 같다. 채널은 바뀌어왔지만 기부자가 연결을 원한다는 사실은 그때도 지금도 같다.

거리로 나갔다. 그리고 디지털이 왔다.

그러던 중 거리모금의 시대가 열렸다. 봄여름가을겨울,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더우나 추우나 거리에 나가 서명을 요청하고 기부를 제안했다. 지하철 역사, 강남역등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면 주저하지 않았다. 좋은 일 한다고 격려해주던 시민들이 계셨고, 달갑지 않은 시선도 존재했다. 하루 종일 밖에 서 있는 건 체력적으로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날 이루어진 기부가 뿌듯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 기억이 더 크게 남아 있다. 거리에서 배운 건 이거다. 기부 의향이 없던 사람도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면 마음이 열린다. 그건 알고리즘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알고리즘이 도달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2010년을 전후해 시스템이 빠르게 변화해갔다. 지로 용지 대신 온라인 결제가, 통장 정리 대신 자동 조회가, 전화 대신 이메일과 게시판이 자리를 채워갔다. 편리해졌고, 빨라졌고, 무엇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게 되었다. 나쁜 변화가 아니었다. 필요한 변화였다.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며

여전히 기부자님들은 우리 곁에 있다. 열여덟어른캠페인으로 처음 손을 내밀어 주신 분도, 재단이 걸어온 시간을 함께 쌓아오신 분도, 각자의 문을 통해 들어오셨지만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신다.

기부자님들은 상품을 소비하듯 기부한 것이 아니다. 외면하고 싶지 않았던 문제들을 통해 재단과 연결된 분들이다. 캠페인은 어쩔수 없이 시작과 종료가 있지만 사회문제는 종료되지 않는다. 어떠한 캠페인이 끝난다고 해서, 함께한 이들의 삶이 끝나는 게 아니듯, 우리는 이슈를 오래도록 함께 바라보겠다는 마음으로 기부자님 곁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름다운재단이 하려는 건 기부자님을 설득하거나 관리하는 일이 아니다. 그 마음이 오래 닳지 않도록, 기부자님과 재단 사이의 시간을 이어 붙이는 일이다. 지로용지를 접어 보내던 사회초년생은 어느덧 딸깍하면 기부가 일어나도록 설계해야 하는 알고리즘 세상 속에 서 있다. 기부의 도구도 시대의 의제도 바뀌어왔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300원 할머니의 정성, 보자기에 싸여 돌아온 저금통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들. 그것들이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의 뿌리라는 거다. 우리는 그 뿌리를 잊지 않으면서, 오늘의 언어로 기부자님들과 연결되는 방법을 찾고 있다.

[함께 맞는 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 신영복 선생님 아름다운재단에 전해주셨던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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