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히 싸운 사람을 기억하며


런던에서 머물렀던 동네 한 쪽에 작은 기념탑이 있고 그 밑에 사람들이 화환을 가져다 놓은 것을 봤다. 무슨 탑인지 궁금해 살펴봤더니 이 마을 주민 중 전쟁에 참여해 전사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알고보니 거의 모든 동네마다(전쟁에서 전사한 사람이 있는 동네마다) 기념탑이나 기념 비석이 있었다. 동네라는 것이 ‘종로구’, ‘서대문구’ 정도의 큰 단위가 아니라 작은 마을, 즉 ‘옥인동’, ‘통인동’과 같은 마을 단위여서 기념물이 생각보다 눈에 자주 들어왔다. ‘영국 사람들은 ‘기념’을 잘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어느 마을에 세워진 작은 전쟁기념관

어느 마을에 세워진 작은 전쟁기념관

나의 할아버지는 6.25 때 전사하셨다. 하지만 나는 내가 자란 동네에서 할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기념탑을 본 적이 없다. 물론 현충탑은 본 적이 있으나 현중탑을 보면서 할아버지를 떠올린 적은 없다. 2015년 추석, 아빠가 고향에 있는 공원으로 날 데리고 가셨다. ‘공원을 좋아하지도 않는 분이 웬 공원이래?’ 하며 따라갔는데 공원 한켠에 참전 군인을 떠오르게 하는 부조가 있고 그 뒤편에 6.25 전사자들의 이름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64년 만에 그의 이름이 적힌 기념물을(묘비를 제외하고) 처음 마주할 수 있었다. (마을 단위가 아니라 ‘시’ 단위로 생긴 것이긴 하지만, 이것만 해도 어디냐 싶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적힌 벤치

영국의 공원이나 호숫가에는 ‘In loving memory of’로 시작하는 작은 팻말이 붙여진 벤치를 많이 볼 수 있다. 고인(古人)을 기념하여 가족, 친지들이 남긴 것이다. 짐작건대 공원에 일정 정도의 비용을 지급하면(벤치 제작 비용) 기념 팻말이 적힌 벤치를 설치해 주는 것 같다. 벤치에 앉을 때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는지, 어떤 사연이 있을지 들여다보곤 하는 버릇이 생겼다.

벤치에 붙여진 작은 팻말

어느 부부의 기념패

Ruby & George Shearn
그들의 사랑과 삶의 여명이 시작된 이곳에서 그들은 처음 만났다.

벤치에 붙여진 작은 기념패

군인이었던 한 남자의 기념패

이 언덕에서 30년 넘게 살아왔던 Colonel Bridges를 기리며
그의 가족과 친구가 이 벤치를 세우다.

벤치에 붙여진 작은 기념패

아버지와 아들의 기념패

사랑하는 아들, 형제 그리고 아버지였던 Graham Lee(1959-1997)를 기억하며. 늘 우리의 마음을 떠나지 않으리.
놀라운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형제였던 Eric Lrr(1928-2005)를 기억하며 언제나 잊지 않을게요.  (아들 Graham은 39살이란 젊은 나이에 아버지보다 빨리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보통 고인을 기리며 무덤이나 납골당에 묘비를 세우지만, 이렇게 생활환경과 가까운 곳, 그리고 특별히 고인과의 추억이 서린 곳에 작은 벤치를 세워 고인을 기념하는 것은 참 특별해 보였다. 

“내게 늘 따뜻하게 대해주시던 옆집 할머니 생각이 간절해서 저녁 식사 후 호숫가에 있는 할머니 벤치에 가서 조금 앉아 있었다.”  

얼마나 효과적인 기념 방법인가!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


영국에서 개인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기념물’들을 보다 보니 이런 생각에 미치게 됐다.

‘우리는 어떤 것을 기념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것을 놓치고 있었던가?’

416기억저장소

416기억저장소

2013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304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1,000일이란 시간이 지났다. 아름다운재단에서 지원했던 ‘416 기억저장소’가 민간차원에서 운영되고 있지만, 이들을 기리는 공적 차원의 기념물이라곤 여태껏 서울도서관 앞 바닥에 설치된 수첩 크기만 한 세월호 분향소 운영 표지석 밖에 본 것이 없다.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바닥에 설치된 표지석

서울도서관 앞의 세월호 분양소 운영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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