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이후의 시민운동’에 대한
우려와 주문은 가능하지만
너무 당연해서일까, 왠지 불편하다

윤정숙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 이후 예상했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시민운동과 정치, 시민운동과 ‘그들의 리더’였던 박 시장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시민운동이 정치에 흡수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고, ‘시민운동의 위기 혹은 새로운 도전’이니 시민운동과 정치의 분명한 ‘선긋기’와 ‘수준 높은 감시역량’을 역설하는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시민운동의 리더가 정치인이 되었으니, ‘박원순 이후의 시민운동’의 태도를 둘러싼 이런 주장은 가능하다. 권력감시형 시민단체들이 독립성과 감시역량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너무 당연한 주장이어서일까, 왠지 불편하다. 시민운동이 권력감시형 운동으로 대표되거나 ‘시민단체운동’과 동일시되던 때는 이미 지났다. 하나의 정의와 영역으로 묶어낼 수 없이 빠르게 분화된 시민운동은 ‘시민단체운동’에서 ‘시민들의 운동’으로 넓어졌다. 개인의 ‘1인 시민운동’과 개인들의 작은 운동들은 기존 시민단체의 울타리를 벗어나 움직이며 확대되고 있다.

2008년 촛불집회에서 보았듯이 시민들은 기존 시민단체들의 주도성을 기대하지 않으며, 단체가 자신을 대변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라는 강력한 소통도구를 이용해 ‘대변자’나 매개체 없이 수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직접 관계를 맺어가며 자신들의 운동을 통해 서로 묶였다 흩어지며 운동의 다양한 구심을 만들어간다. 스스로 ‘시민활동가’가 된 이들의 실천은 정치와 운동의 이분법적 경계로는 제대로 포착되지 않으며, 전통적인 진보와 보수, 제도와 생활영역, 시민과 운동가, 낡은 좌우의 구별로도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또 한편 ‘시민들의 운동’은 지역의 풀뿌리 운동으로, 거대담론에서 생활의제로 분화되면서 각기 다양한 생활정치의 현장을 만들어낸다. 얼마 전 서울 월계동 주택가 도로의 방사능 오염을 측정해 이슈화한 ‘차일드 세이브’라는 카페 조직은 “나라에서 우리 아이의 안전을 지켜주지 않아 평범한 주부들인 우리들이 스스로 나섰다”고 선언했다. 3000여명의 회원들은 핵과 원자력 관련 자료를 공유하며 공부하고, 휴대용 방사능 측정기로 생활의 안전성을 지키는 운동을 시작했다. ‘쟁취’가 아니라 스스로 ‘성취’하는 시민들의 생활정치는 정치와 운동의 경계를 넘나든다. 마을공동체를 지향하는 성미산 마을 주민들, 작은 도서관 운동과 지역참여 예산에 참여하는 시민들, 난민문제를 알리는 광장의 플래시몹에 참여하는 젊은이들, 무상급식에서 시작해 유기농산물과 땅의 안전,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으로 시야를 넓히는 주부들과 ‘오픈 콘퍼런스’를 통해 자신들이 꿈꾸는 정책을 토론하는 사람들, 이들의 생활정치 안에서 작은 민주주의와 더 나은 민주주의가 자란다. 한 지역 시민은 “이번 선거에서 정파적 선택에 대한 ‘결벽증’을 벗어던졌다. 내 생활을 바꾸어준다는 믿음이 있다면 어느 정당, 어떤 후보라도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정치를 생활의 영역에서 바라보고, 자기 삶에 변화를 가져다줄 정치를 적극 선택한다는 시민들에게서 ‘새로운 시민성’이 자란다. 시민단체운동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생활 안에서 정치를 읽어내고, 어떤 정치가 자신의 삶을 바꾸어주는 데 진심을 다할지를 알아보는 안목을 키워간다. 거창한 영웅적 행동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침묵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시민성의 덕목이라는 스탠리 코언의 말처럼 그들의 작은 실천은 ‘선긋기’보다는 두 선을 연결하는 새로운 실험을 한다. 걱정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선긋기와 선맺기를 유연하게 선택하는 시민적 지혜도 쌓게 될 테니까.

 글 윤정숙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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