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이러니하다.

드라마 작가였던 내가 미디어 인식개선 프로젝트 담당 간사가 되었다니”

열여덟 어른 캠페인 ‘손자영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1%나눔팀 윤이나 간사입니다. 시즌3는 어떤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지 참 많은 고민이 들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만나기 전, 나의 오래된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다소 낯설고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손자영 프로젝트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인연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제 이야기부터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한때 드라마 작가였던 한 담당간사가 미디어 인식개선 프로젝트를 맡게 된 이야기를요.

현수막이 떨어지고, 내 인생의 드라마가 시작되다.

대학교 입학식 하이라이트. 수백 명의 신입생이 한 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술관) 옥상부터 대형 현수막이 펼쳐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지는 사이, 드디어 우리 과의 현수막이 펼쳐졌다. 슬로건을 본 순간, 나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 너희들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늦잠꾸러기였던 중학생 시절, 일요일이면 아침 8시에 일어나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티비 앞에 앉았다. 나와 동갑이었던 여자주인공은 다혈질에 말괄량이까지 나를 닮았다. 주인공이 어려움을 헤쳐가는 과정을 함께 겪으며 나도 위로를 받고 함께 성장했다. 드라마가 종영 했을 때는 펑펑 울기까지 했다. 더 이상 주인공 친구를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을 달래며 주인공이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했다. 그때 느꼈다. ‘드라마라는 건, 누군가의 삶으로 푹 빠져 드는 거구나’. 나는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어졌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드라마 작가를 가장 많이 배출했다는 예술대학교에 들어갔다. 그토록 꿈꿔온 내 인생의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드라마를 처음 배웠던 대학시절 (출처 : 윤이나 간사)

우리 과에서 가장 인기있는 수업은 ‘드라마극본창작수업’이었다. 교수님 눈에 들면 드라마 작가로 스카웃 될 수도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다른 과 학생들까지 몰릴 만큼 인기가 많았지만 나는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첫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한 여자 교수님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포스 넘치던 교수님은 바로, 내 인생드라마를 쓰신 그 드라마 작가님이었다! ‘아, 나는 드라마 작가가 될 운명인가보다’ 착각할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드는 방법부터, 시청자가 좋아하는 명대사 만드는 방법까지 알면 알수록 드라마라는 세계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드라마 작가라는 꿈에 한층 다가선 것 같았다.

첫 드라마 대본을 받은 순간 (출처 : 윤이나 간사)

드라마 작가실 문 앞, 문을 열면 처절한 세상이 열렸다.

오랜 바람 끝에 나는 드라마국을 뛰어다니는 작가가 되었다. TV에서 보던 배우들을 이제는 복도에서 지나치며 보게 되었다.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매일 아침 작가실 문 앞에는 배우 프로필이 쌓여 있었다. 나는 프로필을 꼼꼼히 살펴보며, 내가 쓴 드라마 대본에 어울릴 만한 캐릭터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곤 했다.

드라마 회의실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본을 사이에 둔 감독과 작가의 묘한 신경전이 팽팽했다. 대사를 바꾸자는 감독과 그럴 수 없다는 작가 의견이 대립했다. 작가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대사 한 마디’가 전부는 아니었다. 회당 제작비, 배우 캐스팅, 방송 편성표, 배우 소속사 입장 등. 드라마 한편 찍는데 정말 많은 논의가 필요했다.

대학 시절 꿈꿨던 드라마 작업은 그리 진지하고 숭고한 작업은 아니었다. 빠듯한 일정 때문에 실제 인물 취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집필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작가, 감독의 직관과 주관적인 감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들도 많았다. 드라마틱한 상황을 위해 ‘고아’, ‘입양아’ 등 캐릭터 설정들은 빠르게 만들어졌다. 과연 이런 환경에서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내가 경험한 드라마 세계는 극히 일부였다. 드라마 작가, 감독 선배들은 좋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며 드라마국을 나왔다.

한 중학생 소녀의 꿈은 마침내 이루어진 듯 했다. 그러나 정작 ‘누군가의 삶으로 푹 빠져드는’ 그런 드라마를 쓰지는 못했다. 더 이상 드라마를 보지 않았고, 드라마국 세계는 내 기억에서 점점 잊혀져 갔다. 내 인생의 드라마는 이렇게 끝이 나는 것 같았다.

몇 해가 지나, 나는 아름다운재단에서 <열여덟 어른> 캠페인을 담당하는 간사가 되었다. 어느 날,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손자영 프로젝트 맡아볼래?” 손자영 프로젝트는 고아 캐릭터를 만드는 드라마, 영화 관계자에게 당사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프로젝트였다. 드라마 현장을 떠나온 내가, 드라마 관계자들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니! 너무나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하.. 도대체 팀장님은 왜 내게 이 프로젝트를 맡기신 걸까..?’

나는 다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보육원 출신’ 주인공이 많았다. 드라마 작가로 생활 했을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프로젝트를 맡고 보니 너무나 많은 고아 차별 장면과 대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만약 어디선가 드라마 감독, 작가들이 고아 캐릭터를 만들고 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실제 당사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내 마음 속에 여전히 드라마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다는 걸 느낀 순간이었다.

나는 왜,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었을까?

만약 드라마 작가가 내게 와서 “그래서 고아를 어떤 모습으로 바꿔달라는 거야?” 라는 질문을 한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조건 멋지고 성공한 모습으로 바꿔달라는 건 아닌데. 고민하면 할수록 더욱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졌다.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었던 중학생 시절을 떠올려 봤다. 나는 그때 왜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었을까. 주인공의 대사 한마디가, 주인공이 겪은 여러가지 상황들이 내 감정을 콕 건드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 대사, 그 장면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드라마 작가는 주인공의 삶을 어쩜 그렇게 생생하게 잘 표현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전히 하나뿐이다. 바로, 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드라마를 비롯해 영화, 웹툰 등 미디어를 만드는 사람들은 사람에게 관심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언제 행복해 하는지, 아파하는지, 슬퍼하는지, 공감하는지 깊은 이해가 없으면 좋은 작품이 나오기 어렵다. 한때는 나도 시청률 20% 드라마를 쓴 작가, 회당 원고료를 가장 많이 받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물론, 여전히 꿈은 남아있다. 하지만 드라마를 다시 쓸지 안 쓸지는 모르겠다. 그전에 내가 누군가의 삶에 깊은 관심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먼저 묻고 싶다. 내가 지금 가장 가까이서 만나고 있는 자립준비청년들의 삶에 깊은 관심이 있는지, 이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지, 사람들에게 이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전하고 싶은지.

나는 어쩌면 드라마 작가로서 가장 중요한 태도를 이제서야 배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드라마 현장이 아닌, 당사자와 함께 하는 이곳에서.

시즌3 손자영 프로젝트 바로보기 👉 https://beautifulfund.org/eighteen-advoc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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