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제주, 지속가능한 우정

정지운(18세), 하유장(18세), 조윤아(18세), 박진서(18세), 김정혁(18세), 오정원(17세), 김근우(16세), 이하민(16세). 이상 8명의 청소년으로 결성된 시나브로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을 뜻하는 팀명처럼, 여행을 준비하며 시나브로 서로를 알아가고 길 위에서 시나브로 가까워졌다. 학교도 동네도 제각각인 8명의 유일한 접점은, 사단법인 호이의 청소년 대상 세계시민교육 프로그램인 ‘희망의 비, 헤르켄토’를 이수했다는 것.

2018 길위의희망찾기 시나브로팀

길 위에서 시나브로 가까워진 시나브로팀

헤르켄토 프로그램을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테마로 환경, 인권, 평화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해온 아이들은 이같은 관심 이슈를 제주 여행에 접목해보기로 했다. ‘길 위에서 시간을 만나다, 제주’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제주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비교해 변화를 살피고, 변화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고민해보기 위한 3박 4일 간의 여정이다.

“비자림과 곶자왈, 용눈이오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온 제주의 자연을 만나고 싶어 고른 장소예요. 과거와 비교해 제일 큰 변화가 일어난 곳은 강정마을일거라 생각했어요. 지난 10년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갈등의 역사와 변화된 마을의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어요.” (정지운)

리더를 맡은 지운

리더를 맡은 지운

시나브로 제주에 물들다

제주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늦은 오후에 도착한 만큼 여행 첫날은 가볍게 제주의 전통시장을 구경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가까운 전통시장을 검색해 제주의 첫 방문지로 선택한 곳은 중문향토오일시장. 활기 넘치는 시골 장터의 진면목을 보여주리라 기대했건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시장은 예상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규모도 작고 한산했던 것. 제주의 첫 일정이 이대로 어그러지고 마는 것인가 고민할 즈음, 가이드 유장이 숙소에서 멀지않은 또 하나의 전통시장을 찾아냈다. 가이드의 임기응변으로 찾게 된 서귀포매일올레시장은 볼거리와 먹거리가 즐비해 여행객의 설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중문향토오일시장의 썰렁함에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매일올레시장을 찾아 대안을 제시한 가이드와 리더(지운)의 순발력 덕분에 첫 일정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계획대로 일이 풀리지 않더라도 즐기며 나아가다 보면 또 다른 길이 생기는 것 같아요.” (조윤아)

참가 학생 두 명

계획대로 일이 풀리지 않더라도 또 다른 길이 생긴다는 윤아(오른쪽)

둘째 날은 용눈이오름과 김영갑갤러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이 둘을 하루 코스로 엮은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제주 오름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린 사진가 김영갑, 그가 가장 사랑했던 오름이 용눈이오름이라는 것. 2017년 여름의 용눈이오름을 만나고 내려와 김영갑갤러리에서 마주한 십 수 년 전 용눈이오름의 사계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오늘의 길 위에선 만나지 못한 제주의 시간이, 누구보다 제주를 사랑했던 사람의 시선으로 고스란히 간직되어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진 초지, 무리지어 다니는 말들. 말똥을 피해 걷느라 좀 신경을 쓰긴 했지만, 오름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김영갑갤러리에선 용눈이오름의 사계절을 다 만날 수 있었는데 좀 전에 보고 온 오름을 사진으로 다시 만나니, 더 깊이 다가왔던 것 같아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들과 만난다는 느낌도 특별했고요.” (오정원)

시나브로팀 여행코스 표

제주의 과거와 현재를 엿볼 수 있도록 짠 여행코스

사실, 둘째 날은 버스 대신 콜밴을 이용할까도 생각했었다. 숙소에서 용눈이오름까지 콜밴을 이용할 경우, 이동시간의 절반을 단축할 수 있었기 때문. 문제는 만만치 않은 경비였다. 콜밴 이용에 자그마치 15만원이 드는 터라, 간밤엔 이 문제를 공식안건으로 올려 회의를 열기도 했다. 콜밴을 고수할 경우의 이점은 시간 절약 및 피로 경감. 콜밴을 포기할 경우의 이점은 경비 절감으로 흑돼지삼겹살 파티가 가능하다는 것. 결론은 만장일치로 흑돼지 승! 아이들은 길 위에 시간을 조금 더 쓰고 몸이 조금 더 피로한 쪽을 택했다. 이 모든 수고로움은 흑돼지삼겹살이 충분히 보상해줄 테니까.

“제주도 버스는 여기저기 정차를 많이 해서 짧은 거리여도 시간이 오래 걸려요. 배차 간격이 길어 버스를 한번 놓치면 한 시간을 기다리게 될 수도 있고요. 그래도 버스마다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고, 에어컨이 시원해서 좋았어요. 하지만 성인이 되어 제주도를 다시 찾는다면 역시 렌터카를 이용해야 할 거 같아요.” (이하민)

시나브로팀 참가학생

성인이 되면 렌터카를 이용해 제주도를 다시 찾고 싶다는 하민

시나브로 친구에 물들다

셋째 날은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숲 곶자왈과 섬 여행에 빠지면 섭섭한 코스인 해수욕장을 결합한 일정으로 진행됐다. 제주곶자왈도립공원으로 향하는 시나브로 멤버들의 옷차림은 가벼웠다. 공원이고 숲이라 했으니, 꼭 트래킹 복장을 갖출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 더욱이 오후에 가게 될 해수욕장을 겨냥해, 여름 해변가에 어울릴 차림으로 잔뜩 멋을 낸 친구도 있었다. 곶자왈이 돌과 덤불의 숲이라는 걸 자료로 읽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상치 못했던 까닭이다. 결국 시원하게 드러낸 팔과 다리는 모기에 잔뜩 물리고, 샌들을 신은 발은 돌무더기 위에서 어디를 짚을지 몰라 허둥대고, 숲속의 요정 같은 인생 샷을 찍으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예상을 빗나간 건 중문해수욕장도 마찬가지. 수영복까지 챙겨갔건만 태풍 예보가 뜨는 바람에 아예 입수 금지였다. 엄청난 파도 때문에 바다에 발 한 짝 못 담갔지만, 해안가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바닷물을 흠뻑 뒤집어썼다.

“곶자왈 트래킹은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했던 곳이라 특히 기억에 남아요. 오랜 시간이 만든 울창한 숲이잖아요.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자연을 파괴하는 일은 그곳에 쌓여있는 시간들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박진서)

시나브로팀 참가학생

자연을 파괴하는 일은 그곳에 쌓인 시간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

마지막 날 아침엔 강정마을로 향했다. 인권과 평화, 환경 문제를 아울러 생각해볼 수 있는 강정마을은 시나브로의 여행 기획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있는 장소였다. 아이들은 마을입구 평화센터에서 지난 10년 강정마을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한 자료와 사진을 훑어보고, 강정해안에 자리 잡은 해군기지를 둘러봤다.

“TV로만 접했던 강정마을과 해군기지를 직접 본 게 기억에 남아요. 마을을 구경하다가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에 앞장섰던 신부님을 마주쳤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안보를 이유로 한다지만 해군기지 건설이 과연 최선일까, 주민의 동의 없이 인권을 짓밟으면서까지 건설해야 할 당위성이 있는 걸까 의구심이 들어요.” (김정혁)

시나브로팀 참가학생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의 당위성에 대해 생각해본 정혁

다소 무겁고 착잡한 마음으로 강정마을 견학을 마친 시나브로는 제주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인 비자림으로 향했다. 여행의 마침표는 초록 숲이 건네는 위로로 찍고 싶었던 까닭이다. 고등학생 형, 누나들 틈에서 중3 막내 라인을 형성하고 있는 단짝 하민과 근우는 제주 여행에 거는 기대감 중 ‘힐링’에 대한 욕구가 가장 컸다(고1, 고2 못지않은 중3의 스트레스 강도를 짐작해볼만 하다). 하지만 가장 기대했던 바다 수영은 태풍 때문에 좌절되고, 가벼운 산책인 줄 알았던 곶자왈과 용눈이오름은 생각보다 강도 높은 트래킹이라 막내들이 원했던 힐링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그래도 비자림 산책은 제주 여행의 반짝이는 순간들을 죄다 흑돼지 요리로만 기억하는 막내들에게도 흡족한 휴식의 기억으로 남은 모양이다.

“비가 왔지만 가벼운 산책 수준이어서 괜찮았어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흙냄새, 풀냄새, 빗속에서 더 초록초록한 나무들… 이게 힐링이구나, 하면서 걸었어요.” (김근우)

가이드란 막중한 책임감 때문에 버스 안에서 다른 친구들처럼 쉬 잠들지 못했던 유장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가장 나중에 잠들었던 모양이다. 유장이 기억하는 여행의 마지막 풍경은 제주 버스 안에서도 숱하게 보았던 그것, 곤히 잠든 친구들의 얼굴이었다.

시나브로팀 참가학생

가이드로 활약한 유장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다들 뻗어 자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우리 모두 최선을 다했구나 싶고,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에 그 시간이 평화롭게 느껴졌어요. 우리가 탄 게 저녁 8시 비행기였는데, 8시 10분부터 제주엔 폭우가 쏟아졌다고 하더라고요.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올라갈 때 천둥이 치더라니…. 다음날 뉴스로 물에 잠긴 서귀포시를 보며 우리의 여행운을 새삼 곱씹어보게 됐는데, 소소한 행운들이 계속 따라왔더라고요. 새삼 고마웠어요.” (하유장)

글 고우정 l 사진 임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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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희망찾기]란?
아름다운재단이 진행하는 청소년 자발적 여행활동 지원사업 ‘길 위의 희망찾기’는 2001년부터 현재까지 아동청소년들에게 국내외 여행 프로그램을 지원함으로서 ‘청소년 스스로 만들어가는 여행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012년부터는 여행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 트래블러스맵과 함께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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