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사 인터뷰> 일의 기쁨과 슬픔 – 주제 ②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아름다운재단의 일과 나) 아름다운재단에서 일하는 동안 간사들은 어떤 경험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아름다운재단에서 일하는 한명의 간사이지만 동시에 삶을 살아가는 한명의 인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두번째 주제로, 간사들이 일하는 동안 경험한 일과 삶의 이야기를 다뤄보았습니다. 예술가들이 [정기나눔팀 박초롱 간사]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습니다. 간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아름다운재단의 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과 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
박초롱 간사님이 자주 되새기는 말들이 힘들 때마다 문득 도착하는 ‘편지’와 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뷰 대화록을 재구성해서 김채영 군에게 보내는 편지(답장)와 형식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 허나영 작가
허나영, <어느 날, 도착한 편지 한 통으로부터> art zine (원고지 7매, 175X250mm), 2016
[ 작품 설명 ]
인터뷰가 기부자가 손으로 쓴 편지 한 통에서 시작된 것을 떠올리며 ‘편지’라는 형식으로 꼴라쥬를 만들어보았다. 작가인 내가 박초롱 간사님께 쓴 편지는 200자 원고지 7장에, 박초롱 간사님을 인터뷰한 내용은 편지글의 형식으로 바꾸어 400자 원고지 8장에 모두 옮겨 적었다. 박초롱 간사님이 기부자의 편지를 받은 지 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예술가로서 이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메신저-우편배달원 같은 위치에서 이야기들을 이어보고 싶었다. – 허나영 작가
# 편지 하나
박초롱 간사님, 안녕하세요. 허나영입니다.
지난 여름, 보여주신 한 장의 사진 이미지와 그 때 들려주신 이야기들이 제 안에 점점 파장을 일으키며 긴 여운으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편지라는 형식을 빌어 못다한 이야기를 좀 더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14년 당시 저는 노란 봉투 캠페인을 기사로만 접하고 그냥 지나쳤었는데, 그 때 함께하지 못한 마음의 빚, 부끄러움 같은 것이 스스로에게 느껴져서 더 깊게 닿았는지도 모릅니다.
노란봉투 캠페인 때 수많은 기부자들로부터 1,000통의 편지를 받으셨는데, 그 중에서 언급하신 한 통의 편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힘들고 무기력함이 덮칠 때마다 고등학생 기부자인 김채영군이 육필로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으며 힘을 낸다는 말씀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어요. 그리고 캠페인이 종료 될 때 재단 블로그에 직접 쓰신 맺음말 “그것은 ‘남’을 돕는 동시에 ‘나’를 돌아보는 과정의 증명이었습니다.” 짧게 쓰신 글이었지만 묵직하게 다가왔고, 맺음말을 처음에 길게 썼다가 지우고, 썼다 지우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초롱 간사님이 이때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셨을까… 떠올리게 되더군요.
2014년 노란봉투 캠페인 당시에 고등학생 기부자였던 김채영군은 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을까, 또 얼만큼 성장했을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초롱 간사님이 만약 김채영 군에게 답장을 쓰거나 혹은 마주할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이야기를 건네고 싶으신지도 궁금해졌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시민단체에서 일했는데, 그 때 모금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수많은 난관에 봉착하며 무력감과 패배감의 감정을 자주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일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소망하던 것들도 계속 좌절되었고 한동안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저에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이 곁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요즘 초롱 간사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되뇌이며 마음을 다시 잡게 하는 일은 무엇인지요? 아름다운재단에서 일하면서 보람도 있지만 말 못할 애환과 고민도 분명히 양가적으로 있지 않을까 해요.
김채영군의 편지가 초롱 간사님께 지표가 되어주며, 괴로움에서 끝내지 않고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해준 것처럼, 두 사람이 발신하고 수신하는 편지가 그것을 읽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새로운 응원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제가 김채영군, 초롱 간사님 두 사람으로부터 큰 위로와 힘을 받은 것처럼요.
2016년 9월 23일 허나영 드림
허나영, <어느 날, 도착한 편지 한 통으로부터> art zine (원고지 8매, 210X97mm), 2016
# 편지 둘
김채영군의 편지를 읽었을 때 수많은 감정이 떠올랐어요. 현장에 있는 순간은, 심연에 돌을 떨어뜨리면 밑바닥에 있는 것들이 확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 언제나 그랬어요. 허나영 작가님의 편지 첫 줄을 읽은 순간, 2014년 3월 22일 그 친구 편지를 처음 읽었던 당시로 돌아가 그 때 느꼈던 감정들이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어요.
노란봉투 캠페인 때 수많은 편지들을 받았어요. 감동적인 편지들 많았는데, 그 중에는 구순 노인이 지렁이 같은 글씨로 “후원금을 잘 써주시오.” 라는 쪽지를 함께 보내오기도 했고, 꼬마 아이의 그림일기 등 정말 많았어요. 모든 편지가 너무나 감동스럽고 고마웠지만, 제 괴로움을 달래주지는 못했어요. 기부자들은 왠지 후원금과 편지를 보낸 후에 감정을 털어버리는 것 같았어요. 빚진 마음을 터놓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희망이 보여서 한편으로는 부러웠어요. 그러나 나는 이곳에 있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고, 앞으로도 누군가는 또 죽을 것이고, 아플 것이고. 하지만 이 순간의 희망에 대해 떠올렸어요.
1,000 통의 편지가 모두 1,000개의 돌을 올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후원금 14억이 모인 것 못지 않게 노동자들의 복귀가 중요하고, 그 와중에 분신자살이 있었고요. 김채영군의 편지를 읽으면서 왜 울고 힘들었을까? 편지를 보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이 작은 친구도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이 친구도 돌을 얹고 있구나. 해소하지 못하고. 여전히 돌을 얹고 있구나.
편지를 보고 체화된 좌우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예요. 그 문구가 머리 속에 현판처럼 박혔어요. 나도 뭔가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채영군이 편지에 쓴 문구 “연대라는 것이 필요하다. 작지만 내 할 일을 찾아서 하겠다. 너무 늦게 보내 죄송하다.” 가 기억에 남아요. 제가 죽을 때까지 이 사회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된다.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하는 거다. 라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만큼 괴로워하는 사람도 많겠구나. 내일도 나는 새로운 실수를 반복하고. 새로운 실패, 새로운 괴로움을 맞이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하고 같이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로 이 친구는 지금 어떤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지 걱정되기도 해요. 하지만 굳이 알고 싶지는 않아요. 이 친구도 타오르고, 또 한번의 좌절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이 친구는 다만 어린 나이에 돌을 미리 얹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할 일을 잘 찾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랬으면 하고 바래요. 더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절망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노란봉투 캠페인은 남을 돕는 동시에 나를 돌아보는 증명이었어요. 쓸 때는 누군가에게 좋은 캠페인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은 지점이 더 컸었는데, 마지막 한 줄을 쓸 때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앞 줄은 쓰는데 4시간이 걸렸지만 뒤에 마지막 한 줄은 1시간 반이나 걸렸어요.
아름다운재단에 오기 전에 홍보대행사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홍보대행사는 업계의 협의를 거치고 결과치를 대하는 일이고, 개인의 능력이 중요했어요. 재단에 오고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다른 걸 배웠어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기부자들이 실제로 참여를 하게 된다는 것이 가장 달랐어요. 제 아무리 매끈한 문장을 만든다고 해도 기계적으로 마음을 안 움직이죠.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뼈저리게 알게 되었어요. 옛날에는 진심을 담아 일한다는 말이 거북했었어요. ‘진심’이란 말도 어찌 보면 포장되어 있는 말이고요.
아름다운재단에 와서 왜 내가 여기에 진짜 마음을 담아야 하는지, 이것만큼은 내가 지켜야지를 고집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도하지 않은 상황들이 겹쳐서 저를 바꿔가는걸 보면서 많은 걸 배우게 되었어요. 노란봉투 캠페인은 운명 같은 거였어요. 저를 만들어가는 첫 번째 계단이었고. 그리고 아직도 단 한번도 닿지 못한 <기억 0416> 세월호 캠페인이 있죠. 세월호 캠페인 동안 이 친구 편지를 다시 부여잡고 살았어요.
세월호 캠페인은 유가족을 지원하는 사회복지연합체를 지원하고, 사건사고의 기록관 지원, 지역단체의 트라우마를 향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프로그램 개발지원 및 사업을 했었어요. 저는 그때 한번도 안 울었어요. 지금도 울지 않아요. 세월호 관련해서는 울 수가 없어요. 그 동안 불면증에 많이 시달렸어요. 그때 저를 잡아준 게 이 친구의 편지였어요. 은인 같은 존재예요. 노란봉투 캠페인은 ‘다짐’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면, 세월호 때는 이 친구의 편지를 붙들고 ‘나를 살려줘’ 하는 느낌이었어요.
바라던 것들이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아요. 그게 절망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자기에게 해일처럼 오는 때, 각자에게 그 시간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캠페인팀에서 정기 기부팀으로 옮겨 생계형 체납자 등 사각지대에 놓은 사람들을 개발하고 돕고 있습니다.
활동가로 산다는 것. 연대, 이 일을 하면서 같이 잘 사는, 나랑 너랑 같이 중요하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어요. 조금 더 힘든 사람들에게 내 여유를 나눠주는 것, 같이 사는 것. 될 것 같아서가 아니라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해야 되는 것. 그렇게 용기를 가지고 한 걸음 나아가고 싶습니다.
2016년 9월 27일 박초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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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장혜윤 간사